'골드실버스타'에 해당되는 글 2건

  1. 유퀴즈 4 2019.10.10
  2. 선셋 5 2019.10.01

유퀴즈

from 티비를보다 2019. 10. 10. 22:17



   월요일과 수요일, 금요일에는 거의 옆사람이 먼저 퇴근해 있고, 내가 여덟시 즈음에 집에 도착한다. 살이 찌고 있는 심각성을 깨닫고 있지만 그래도 아쉬워 뭔가 간단하게 하거나 시켜서 먹는다. 저녁에는 항상 티비 앞에 상을 펴놓고 나란히 앉아 먹는다. 한글날을 앞둔 화요일 밤, 그러니까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공휴일을 앞둔 아주아주 신나는 밤에 멕시카나에 치킨을 시켰다. 후라이드 반, 양념 반. 맥주를 시키지 않았다고 해서 말이 되냐고 다시 전화를 하라고 했다. 멕시카나 주인분이 말씀하시길, 뜨근뜨근한 치킨과 함께 배달하면 미지근해져서 그런지 맛이 없다는 항의가 많이 들어와 이제 맥주는 배달하지 않는단다. 아쉽지만 냉장고에 친구가 주고 간 맥주가 있으니까. 따끈따끈한 치킨에 각자의 맥주와 소주를 따라놓고 티비를 봤다. 큰 자기와 작은 자기가 나오는 유퀴즈온더블럭. 한글날 특집이라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문해학교라는 곳을 찾아갔다. 글자도 모른채 한평생 살아오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교육을 받는 곳이었는데 학구열이 엄청났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배우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고 했다. 오래오래 건강해서 더 많이 배우고 싶다고 했다. 한 부부가 나란히 손을 잡고 긴 시간을 걸려 통학을 하는 모습이 나왔는데, 할머니는 가난해서 어릴 때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해야했고 그 때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고 했다. 살면서 힘든 순간들이 많았지만, 지금 이렇게 배울 수 있어 너무나 감사하다고 했다. 부부는 글자를 몰라 식당에 가도 어느 식당에나 있을 평범한 메뉴 백반만 시키고, 외식도 잘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제는 햄버거도 주문할 수 있다고 커다랗게 웃었다. 긴 인터뷰 끝에 큰 자기와 작은 자기는 할아버지에게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자음과 모음을 연결해서 만들어보라고 했다. 그 전에 인터뷰한 사람들은 쉬운 단어들을 골랐었다. 사랑, 정 이런 것들. 그런데 할아버지의 단어는 좀 어려웠다. 모두 세 글자였고, 두 글자를 만들자 큰 자기와 작은 자기, 그리고 우리는 알아차렸다. 마지막 글자가 '순'일 거라는 걸. 박묘순. 할머니의 이름을 할아버지는 천천히 만들어 가고 있었다. 아, 그때부터 우리 두 사람의 눈물샘이 터졌다. 티비를 보다 나 혼자만 울어댄 적은 있어도, 같이 운 적은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어서 할머니는 '사랑'이라는 평범한 단어를 만드는 것 같았는데, 그 뒤의 글자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할아버지의 단어 때문에 울었던 제작진이 할머니의 모음과 자음이 모자라는 지경까지 되자 웃기 시작했다. 티비를 보던 우리도 울다가 웃었다. 할머니의 단어, 아니 문장은 이것. '사랑하는 우리 신랑 너무너무 사랑해요. 행복하게 삽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함께 살면서 힘든 시기가 많았다고 했다. 포기하지 않고 잘 버티고 견뎌왔으니 이렇게 서로가 소중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영어공부부터 시작해야겠다! 불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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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from 여행을가다 2019. 10. 1. 22:32



  하와이에 있는 동안 이틀을 제외하고 매일 일몰을 봤다. 이틀은 쇼핑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와서, 차 안에서, 요트 위에서, 투어 아저씨가 추천해 준 식당에서, 말로만 듣던 와이키키 해변에서. 그렇게 매일매일 보는데도 질리지가 않았다. 아름답고 아름다웠다. 일출을 보러 에베레스트 다음으로 높다는 산에도 올라갔지만, 해가 뜨는 건 한 순간이었다. 뜬다뜬다 하다 짠-하고 뜨고 나면 끝이었다. 순식간에 환해지고,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한순간에 보였다. 해가 지는 건 달랐다. 나 진다진다 하다 뚝-하고 사라져버리는 게 아니었다. 나 간다간다, 가고 있다고, 그런데 진짜 가도 되겠어? 아쉽지 않겠어? 좀 더 보라고, 얼마나 보고싶을 텐데, 이건 오늘만 보여줄 수 있는 빛깔이라고. 봤어? 확실히 본거지? 응응? 아주 미련이 많은 아이더라. 방금 본 풍경도 그 아이의 손길이 닿으면 그 전과는 다른 낭만적인 모습이 되었다. 찰나의 일출보다 여운이 긴 일몰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내 스타일이었다. 덕분에 아름답게 지는 해를 오래 볼 수 있었다. 


   일요일에는 아침에 학원에 가서 저녁이 되어서야 들어오는 옆사람이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말했다. 서쪽하늘을 봐. 지금 당장. 엄청 예뻐. 탁 트인 채로 운전을 하는데 순간 하와이 같이 엄청나게 예쁜 하늘이 보였단다. 집에 있던 나는 건물들에 막혀 약간의 붉은 하늘만 보였지만, 예쁜 하늘을 발견하고 같이 보자고 전화해준 마음이 고마웠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여운이 그득한 일몰의 멋진 광경은 바다 건너 하와이 뿐만 아니라 지금 이 곳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단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옆사람이 집에 도착한 뒤 밥을 먹으러 밖으로 나가기까지 옅어졌지만 주황색 빛이 아직 있었다. 그렇지만 그곳의 하늘은 정말 예뻤지. 머리카락이 기분좋게 흔들렸던 선선한 바람도, 쏴아쏴아 높지 않던 바다소리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나란히 앉아 그 광경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던 일도. 오래오래 기억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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