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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 눈사람 - 눈의 여행자
    서재를쌓다 2013. 9. 5. 23:01

    눈의 여행자
    윤대녕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눈의 여행자>를 꺼내 읽은 건 김연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 때문이었다. 김연수는 언젠가 꼭 한번은 눈에 고립되고 싶다면서 두 작품을 언급하는데 한 작품이 이제하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고, 다른 한 작품이 <눈의 여행자>이다. 산문집을 읽고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찾아 읽었다. 그리고 <눈의 여행자>를 꺼냈다. 오래 전에 읽은 책이다. 가물가물하지만 소설가가 나왔고, 소설가가 눈 속을 헤매였고, 한 여자가 있었다. 소설가가 눈 속에서 울기도 했다. 그런 이미지만 남아 있었다. 다시 꺼내 읽으니 내가 이 소설을 좋은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었던 건, 순전히 눈 때문인 것 같다.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는 소설가는 어느 날 한 통의 소포를 받는다. 일본에서 온 소포 안에는 어린 아이들이 공부하는 숫자놀이 책이 있었다. 열 개의 숫자가 있었고 열 개의 메모가 있었다. 눈을 찾아 이동하는 메모였다. 어디에 왔으며, 어디에 묵었으며, 무엇을 먹었는지를 기록한 메모. 그리고 눈이 얼마만큼 왔는지도 기록했다. 이 메모대로 여행해 달라는 편지였다. 이유는 적혀있지 않았다. 여행을 하게 되면 자신을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고 보낸 이는 덧붙였다.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는 소설가니까, 에이전시에서는 무조건 가라고 한다. 가서 소설을 완성해 오라고 한다. 모든 경비를 지원해 준다고. 권유가 아니라 강요다. 어쩔 수 없이 소설가는 떠난다. 한 달 전 누군가 눈을 찾아 떠난 도시와 도시를 그대로 이동한다. 되도록이면 같은 방에 묵으려고 하고, 같은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 소설의 마지막, 소설가는 그 메모의 주인을 만나게 된다. 이유도 알게 된다. 왜 자신이 이 눈의 도시들을 떠돌 수 밖에 없었는 지를.

     

        2004년의 나는 이 소설을 어떻게 읽었을까. 2013년의 나에게 이 소설은 오직 눈의 이미지, 그것 뿐이다. 눈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윤대녕은 결심하고 이 소설을 쓴다. 인터뷰를 찾아보니 소설이 씌여지지 않는 시기였다고 한다. 보름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초고를 순식간에 완성했다고 한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처음에 몹시 궁금했던 이야기들이 퍼즐을 맞춰가기 시작하면서 나는 실망했다. 오직 눈 때문에 끝까지 읽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눈을 만날 수 있다. 고독하고 쓸쓸한 느낌의 눈.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소리 없이 차곡차곡 눈이 내린다. 자판기에서 빼내 온 맥주 한 캔을, 무미의 청주 한 잔을, 식어가는 커피 한 잔을, 꺼질듯 말듯한 장작불 한 줌을 마주하는 눈. 혼자여도 외롭지 않은 소설이다. 소설에서 눈은 계속 내리고, 등장하는 인물 누구나 혼자다. 혼자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런 저런 눈에 대한 이야기들을 마음에 담아본다. 홋카이도보다 눈이 많이 온다는 동북부 지역. 일본의 건물은 잘 휘청거리기 때문에 종종 지붕 위로 올라가 눈을 치워줘야 된다는 이야기. 내리는 눈의 종류가 열 가지나 되는 도시 요코테. 학의 탕, 눈의 음이라는 온천이름과 술 이름. 이 소설을 읽고 2004년의 나도 메모를 남겼다. 보라색 하이테크 펜으로 책 앞장에. '04년 2월 14일 토요일 밤. 유키로 가득한 책 한 권을 끝내고 잠바를 주섬주섬 챙겨 입고 집 앞 슈퍼에 들린다. 카스 맥주 2캔, 김, 소세지, 초콜릿, 아폴로, 꿀맛 쫀드기. 마셔야지 ^^' 아, 이건 내 메모에 대한 변명같지만, 소설의 주인공이 굉장히 많이 먹는다. 그..래서 그런 거겠지? 나 발렌타인 데이 때 혼자 뭐 하고 있었던 거니! 뭐.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 응?

     

        "이 소설은 아키타 현에 속해 있는 요코테라는 작은 도시에서 썼는데 커다란 창문을 통해 밤낮으로 눈이 퍼붓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낯선 곳에서 혼자였으므로 고독하고 행복한 순간이 매일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쉴새없이 퍼붓는 눈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눈이 내리면 대낮에도 세상은 어둡고 불현듯 삶은 막막했다. 쌓인 눈은 흰색이지만 내릴 때는 캄캄한 회색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그 일이 추억으로 변했다. 사람이란 추억을 기다리며 삶을 견디는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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