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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젠가, 바닷가
    서재를쌓다 2013. 7. 11. 22:27

     

      

        그래. 이 책들을 또 다 포장하고 풀고 할 순 없다. 언제고 이사를 또 갈거고, 제일 문제는 책이다. 이사짐센터 아저씨들도 책이 제일 싫다고 했다. 몇년 전에 사 놓고 아직도 안 본 책들, 아끼지만 두 번 읽을 것 같지는 않은 책들, 이미 마음 속에 담아 놓아 보내도 될 책들. 그리고 점점 책 욕심이 많아져서 (여기서 책 욕심은 책을 소유하고픈 욕심.) 다 읽지도 못하면서 책을 계속 사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결심했다. 지금 장바구니에 담겨 있는, 당장 필요한 두 권의 책을 제외하고 이제 책을 팔고 난 돈으로만 새 책을 사기로. 그러려면 안 읽은 책들을 열심히 읽어야 겠지. 그렇게 팔고, 또 사고, 읽고, 팔고, 그렇게. 그런데 죄다 아끼는 책이니 그냥 보낼 순 없다. 너와 내가 만났다는 기록은 남겨두어야지.

     

        이 책은, <나를 닮은 집짓기>, <열대식당>,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의 작가의 또 하나의 에세이. 이 작가의 책이 재미나서 계속 읽기 시작해서 <바닷가의 모든 날들>까지 왔다. 출간 순서에 상관없이 읽었더니 저 책에서 했던 얘기가 이 책에도 나오기도 했다. 이 책은 <나를 닮은 집짓기> 전, 혹은 짓는 중, 그리고 후의 이야기. 후의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전이랑 중의 이야기도 조금씩 나온다. 재미나게 읽었다. 결혼한 사람인데 자유로운 결혼생활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작가는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았고, 그걸 즐겼다. 좋아 보였다. 이 부부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고. 작가는 강원도 바닷가에 직접 집을 짓고, 거기서 산다. 이 책은 거기서 사는 이야기. 작가는 개도 키우고 (한 마리는 도망가고, 한 마리는 작가의 다리에 부비부비를 했다) 닭도 키우고, 그 닭에서 난 계란을 소중하게 여기며 (당연하게) 먹었다. 맛나게. 바닷가에 가서 수영을 하기도 하고, 며칠동안 내리는 눈에 밖에 나가지 못하고 고립되기도 하고, 감성돔 낚시를 하는 아저씨에게 머리를 자르기도 했다. 이런저런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있다.

     

        제일 재미나게 읽었던 부분은 동물들에 대한 것인데. 특히 닭! 흥미로웠다. 이런 닭이 있구나, 하고. 나는 닭이면 다 닭대가리 그런 닭들인지 알았지. 제목이 '왕국 없는 왕녀, 타이거.' 타이거는 작가가 키우는 닭의 이름이다. 부부는 닭에게 모두 이름을 붙여줬다.

     

       "대부분의 싸움닭 종자들이 다른 개체에는 호전적이나 인간에게는 매우 친화적이다."

       나중에 책을 읽어보니 이런 구절이 있었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토종닭들과 달리 타이거는 나를 겁내지 않았다. 부르면 오고, 잡으면 잡혔다. 귓볼을 쓰다듬어주면 만족스러운듯 나직하게 꾸르륵거렸다.

       "타이거!"

       마당으로 나가 이름을 부르면 바람처럼 나타나 뒤뚱거리며 걸어 오는 하얀 새.

       "성격이 토종닭들과는 판이하게 달라. 마당 일을 할 때에도 졸졸 따라다니고 외출하려고 하면 계단까지 따라 내려온다니까."

       타이거는 아름다운 닭으로 성장했다. 맵시 있게 몸을 조이는 프록코트를 입은 듯 귀족적인 다리는 날씬하게 뻗어 있고 우아한 몸통은 적당히 통통할 뿐 토종닭처럼 펑퍼짐하지 않았다. 갈색이 밝힌 꼬리 깃털은 부채처럼 하늘을 향해 곧추서 있었다.

    .

    .

       "타이거!"

      정원 어디에 있든, 잠에서 깬 내가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나오면 타이거는 긴 다리로 성큼거리며 곧 내 앞에 나타난다. 표정 없는 오렌지색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꾸르륵거린다. 나 여기 있어, 주인님아.

       "이리 와, 우리 공주."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안아 들면 그 애는 가만히 있다. 내 어깨 위나 팔 위에 올려놓으면 겁이 나는지 날카로운 발톱에 잔뜩 힘을 주고 바들거리며 서 있다.

       다 큰 지금도, 타이거는 병아리 시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토종닭보다 작다. 털갈이가 시작되는지 윤기 자르르 흐르던 하얀 깃털이 조금 보송해졌다. 살진 앞가슴에 손을 넣어 집어 들면 마치 배우기라도 한 것 처럼 훌륭하게 밸런스를 잡는다.

    p. 238-240

     

       훌륭한 닭이다. 이런 닭도 있구나. 지금쯤 타이거는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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