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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 바닷가 - 나를 닮은 집짓기
    서재를쌓다 2013. 5. 1. 10:46

     

     

        둘리틀은 남편이었다.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를 읽고 궁금했던 건, 둘리틀이 누구냐는 것. 성별은 남자이고, 작가와 정말 친한 사람. 둘리틀은 휴가를 내고 핀란드까지 날라와 작가의 여행 마지막 나날들을 함께 보내고 귀국한다. <열대식당>과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두 책을 읽고, 나는 이 사람이 결혼했다고 생각하질 못했다.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며, 책도 쓰고, 그러다 강원도 어느 바닷가 근처에 집을 짓고 혼자서 생활하고 있는 싱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둘리틀이 친한 남자친구인 줄 알았지. 남편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세상에. 둘리틀은 남편이었다. 그리고 내가 전작을 읽으며 상상했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이 책 마지막 부분에 둘리틀과 작가인 듯한 사람의 모습이 사진으로 자그맣게 찍혀 있는데, 왜 둘리틀이라고 이름붙여졌는지 알겠더라. 그리고 그는 생각보다 체구가 작았다. 나는 키가 아주 큰 사람인 줄 알았다. 게다가 그는 연하!

       

       서울의 천편일률적인 아파트에서 그만 살고 싶었던 작가는 집을 짓기로 한다. 서울은 너무 비싸고, 여러 곳의 땅을 검토해보다 결국 강원도의 바닷가 근처로 결정. 둘리틀의 근무지는 서울. 느긋하고 평화로운 둘리틀이다. 이 책에서 작가가 집을 짓느라 공사장 아저씨들과 싸우고, 계획대로 되지 않아 속상해 할 때마다 둘리틀은 느긋하고 평화롭게 이런듯 어떠리 저런듯 어떠리 식의 멘트를 날린다. 아, 나는 하루종일 여름 땡볕에서 개고생하다 전화를 했을 때 그저 멀리서 다 이해하라는 식의 말만 하면 무지 화가 날 것 같은데, 작가는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가 많더라. 아무튼 둘리틀은 주말에 내려오거나, 아니면 나중에 회사를 그만두고 바닷가 집에 와서 생활할 생각을 하고 집터를 강원도로 결정. 그렇게 6개월동안 집을 짓는다. 바닷가 바로 근처는 너무 비싸서 포기하고, 바닷가에서 가까운 곳에.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에 갈 수 있고, 집 뒤로는 나즈막한 산이 있는 그런 곳에.

     

        자신에게 꼭 맞는 집을 짓기 위해, 그리고 최대한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작가는 여러가지를 직접 한다. 설계도도 그려보고, 벽돌도 직접 고르고, 데크의 나무자재도 직접 고른다. 돈 아끼려고 부엌가구를 초짜 사장에게 맡겼다가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고, 매일 삼시세끼 밥을 식당과 공사장을 오가며 나르고, 간식도 챙기고, 음료수도 챙긴다. 아저씨들이 자신의 금쪽같은 집터에 카아카아하고 가래침을 하루에도 수도 없이 뱉어내는 꼴을 보고 인내심을 기르고, 계획대로 하지 않고선 늘 괜찮습니다를 일삼는 안 부장과는 마지막에 결국 한 판 한다. 힘들게 구해온 이탈리아 산 달덩이 조명 하나를 인부들이 깨뜨리기도 하고, 아직 개시하지 않은 변기를 우유 때문에 탈이 난 누군가가 먼저 쓰게 되기도 한다. 수줍음 많은 목수를 만났으며, 마당 한복판에 박아 놓는 바람에 작가를 화나게 만들었던 전봇대는 결국 다시 뽑는다. 이 책의 대부분은 이런 이야기들이다. 초짜 건축주가 6개월에 걸쳐 집을 짓는 동안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이야기들. 작가는 중간중간 말한다. 이렇게는 하지 마라. 나는 이렇게 해서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은 조금씩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도 많았지만 말이다.

     

        읽으면서 작가가 너무 고생을 해서, 아 진짜 이럴 거면 돈이 더 들더라도 그냥 잘 하는 업자에게 맡기지, 너무 지친다, 언제 집 다 지어, 싶었다. 그러다 이 페이지를 만났다. 집을 짓는 동안 숙소를 몇 번이나 옮겨 다니던 작가에게 영화같은 일이 일어난다. 오래된 여관에서 장기투숙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여관의 옥상 물탱크가 터진 것. 너무 낡은 곳이라 보수하는 것으론 안되고, 아예 건물을 허물어야 할 지경. 당장 그날 밤 잘 곳이 없어진 것. 작가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공사 중인 집에서 밤을 보내기로 한다. 여름이고, 창문도 다 끼워 넣었고, 조명도 달았고, 밤을 보내기에 괜찮을 거 같았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아끼는 두 페이지. 236, 237쪽이다.

     

     

       잠을 자기 위해서 잠자리를 만들었다. 현장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스티로폼 조각을 몇 개 모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니던 매트를 덮었다. 겨울 스웨터를 둘둘 말아 베개로 삼자 초라한 침대가 완성되었다. 누우니 등이 배겨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다.

        바깥은 이미 칠흑처럼 어두웠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 바다처럼,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집 안의 불을 모두 끈 후 몇 분이 지나서였다. 짙은 어둠의 연기가 점차 가라앉는 것처럼, 창밖이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했다.

        검정색에서 암회색으로, 다시 회청색으로 변해갔다.

        하늘 저편에 달이 떠올랐다. 어둠에 창백한 하얀빛이 내려앉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숲과 벌판에 깃든 조그만 영혼들이 내는 소리들. 집 바깥과 집 안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존재와 마주한 듯 경외심이 밀려왔다. 수천 수만의 조그만 풀벌레 중 한 마리가 된 듯한 느낌.

       "마당 너머로 산이 보인다. 아주 나지막해..."

       나는 전화기 건너편 서울에 누운 둘리틀에게 들려주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자연 한복판에 빠져든 것처럼, 온통 낯선 것들 투성이다. 지금 보이는 모든 것들을, 들리는 모든 소리들을, 떠오르는 모든 감정들을 빠짐없이 전해주고 싶었다.

       "산을 경계로 해서 그 위쪽은 하늘이라 환하고 그 아래 산은 아주 어두워. 마치 거인이 길게 누워 있는 것처럼 굴곡이 있어. 어떤 광경인지 상상할 수 있겠니?"

        집 아래 펼쳐진 논에서 전력을 다해 우는 개구리와 풀벌레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요란한 소리지만 배경음으로 가라앉아 전혀 시끄럽지 않다.

        나는 아직도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시멘트 냄새 때문에 창문을 열었다. 아주 먼 곳에서 시작된 바람, 차가운 바다를 오랫동안 스치며 날아오느라 서늘해진 무언가가 얼굴에, 내 몸에 닿았다. 이불 삼아 덮고 있던 신문지를 코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흔한 축배도 없이,

     

        첫날 밤이다.

     

     

        이 책. 예전에 <하우스>라는 제목으로 나온 책이 수정되어 다시 나온 것 같다. <바닷가의 모든 날들>이 이 집에서 살면서 쓴 이야기들 같은데, 이제 이 책을 읽을 차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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