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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티비를보다 2012. 8. 12. 01:27

                                                                                        스포일러 잔뜩.

     

     

     

        금요일. Y언니를 만나 세계맥주를 잔뜩 마셨다. 칼로리 폭발 햄버거와 감자튀김과 함께. 세계맥주를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계산을 하니까 코로나에서 나온 핸드폰 충전기를 하나씩 줬다. 모든 기종의 핸드폰을 충전할 수 있는 충전기였다. 우와, 우리는 코로나는 마시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세계맥주를 마시면서 이 드라마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이야기를 했다. 언니가 이 드라마를 나한테 추천해 준 게 2009년.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언니의 말에 따르면, 언니는 나에게 이 드라마와 <사랑이 하고 싶어x3>을 추천해줬는데 내가 이 드라마는 보다가 내 스타일이 아니라면서 그만뒀단다. <사랑이 하고 싶어x3>은 끝까지 다 보고, 감동하고, 이 드라마 제목을 사랑이 하고 싶어 곱하기 삼이라고 말하면 화내고. 언니, 사랑이 하고 싶어 곱하기 삼이라니요. 사랑이 하고 싶어 사랑이 하고 싶어 사랑이 하고 싶어 이렇게 다 불러줘야 해요, 이러면서. (이제는 곱하기 삼이라고 불러줘도 된다. ㅎ)

     

       <수박> 같은, <섹시 보이스 앤 로보>같은 드라마를 해주지 않으니까 이 드라마를 다시 다운받아 봤다. 보다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 이 장면은 기억난다. 어, 나 그때 꽤 많이 봤네. 이러면서 5화 정도까지 드문드문 봤다. 꾸준히 본 건 아니고, 지하철에서 책 읽기 싫을 때, 음악도 듣기 싫을 때, 졸리지도 않을 때, 켜놓고 조금씩 봤다. 그리고 지난 수요일, 마지막 9화를 봤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전철을 타고 오는데 오늘 마지막회를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에서 반쯤 보고, 집에 와 샤워를 했다. 시원해진 상태로 이불을 깔고 누워 나머지 반을 봤다. 늦은 시간이었는데, 엉엉 울었다. 정말 많이 울었다. 어떡해, 어떡해, 이러면서. 이렇게 사라지면 남겨진 사람들은 어떡해, 그러면서. 내가 일찍 알아보지 못했을 뿐 정말 좋은 드라마였다. 처음에는 떠난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였다. 충분한 이별의 시간을 보내고, 앞으로 건강하게 잘 살아가기 위한 이야기였다. 아, 훌륭하다.

     

       십년 전, 하늘을 날던 한 비행기가 사라졌다. 주인공 마유즈미는 이 사고로 사랑하는 친구와 애인을 잃었다. 그 후 마유즈미는 집-회사, 그리고 미래에 타게 될 연금만을 기다리고 있다. 특별한 일 없이 무미건조하게 반복되는 삶 속에서 위안을 얻고 있다. 그런 주인공 앞에 십년 전에 사라졌던 비행기가 나타난다. 사라졌던 친구와 애인도 나타난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마유즈미의 10년 전 별명은 얏치. 그녀의 친구의 별명은 앗치. 얏치와 앗치가 10년 후에 만난다. 38살의 얏치와 28살의 앗치로. 상부의 지시로 일을 끝내지 않고 그냥 돌아가는 38살의 얏치에게 28살의 앗치가 말한다.

    - 늙었구나. 10년이면 그렇게 되는구나. 10년 따위에 지면 안되는 거야. 땀을 내라고. 마음에 말이야. 마음에 땀이 안 흐르잖아. 인생을 버리면 안돼.

    그러자 38살의 얏치가 말한다.

    - 18살에서 28살의 10년과 28살에서 39살의 10년은 다른거야. 같은 10년이어도 다른거야.

     

       그런데 38살의 얏치가 얼마 뒤 알게 된 사실. 이들이 10일 뒤면 다시 사라질 거 라는 거. 그걸 28살의 앗치도 알게 된다. 자신이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가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알고 앗치는 잠시 실의에 빠지지만, 곧 기운을 차리고 38살의 얏치에게 말한다.

    - 내가 사라진 후 많은 것들이 유행했겠지. 나는 분한데, 얏치의 10년에 내가 없었던 것이 분해. 옆에서 여기저기 마구 끌고 다니고 싶었는데. 28살에서 38살까지의 시간을 함께 지내고 싶었어. 난 억울하니까 얏치가 남겨진 시간을 풍요롭게 해주고 싶어. 얏치의 시간이야. 나하고 테츠가 없어지면 얏치는 어차피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갈테니 그때까지는 내가 옆에서 얏치에게 남겨진 시간을 최고로 멋진 시간으로 만들어 줄 거야.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둘도 없이 소중한 시간으로 만들어 줄 거야.

     

       그리고 얏치의 남자친구 테츠도 감동적이다. 누군가 얏치가 왜 좋냐고 묻는다. 그 바보같은 여자를 왜 좋아하느냐고. 그러자 테츠가 말한다.

    - 그 친구가 아니면 안된다구요. 둘이 함께 있으면 너무 자연스럽고 그 친구가 있으면 안심하고 숨쉴 수 있다고 할까. 즐거웠었죠.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즐거웠어요.

     

        드라마가 한 회, 한 회 진행될수록 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씩 줄어든다. 무뚝뚝하고 사무적이기만 하던 38살의 얏치도 조금씩 변한다. 조금씩 즐거워지고, 조금씩 행복해진다. 두 사람이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 즐겁게 지내면 지낼수록 점점 쓸쓸해진다. 한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 눈 앞에 있다는 현실이. 그런데 다시 잃어버린다는 현실. 너무나도 엉뚱한 이 현실을.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쓸쓸해져 온다.

     

       그리고 마지막회. 이 드라마는 이 마지막 이십분을 위한 드라마다. 정말 얼마나 슬픈지 이 이십분 내내 엉엉 울 수 밖에 없다. 이들은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방법을 찾아본다. 다시 돌아가도 죽지 않을 방법을 마지막까지 찾아본다. 결국 성공했을까. 어쨌든 이들은 이별한다. 다시 이별한다. 10년 전의 갑작스런 이별과는 달리, 이번에는 충분한 (아니다, 그걸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별의 시간을 가진다. 서로를 좀 더 이해하려 한다. 좀 더 표현하려 한다. 내가 너를 이렇게 아껴. 니가 사라진 후 이렇게 힘들었어. 그리고 찾아 온 이별의 시간. 주인공 뿐만 아니라 이 비행기에 탔던 다른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 사랑하는 이에게 다시 찾아온 이별의 시간. 드라마는 이 이별의 시간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처음 비행기가 다시 나타났을 때 38살의 얏치는 기운 넘치는 이십대(정확한 나이는;; 오빠인 듯 한데)의 남자친구에게 말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꽃다발을 주고 반지와 함께 사랑을 고백하려 했다. 그러자 38살의 얏치는 한 발 물러선다. 너는 지금의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28살의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자신은 이제 38살이라고. 달라졌다고. 그런데 이 사랑스런 드라마의 남자주인공 테츠는 마지막 9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 나는 네가 좋아. 10년 전의 네가 아니라 지금의 너를 사랑해. 38살의 너를 사랑한다.

    또 이렇게.

    - 나도 널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 10년 후의 널 사랑할 수 있게 돼서 좋았어. 또 만나자.

    마지막은 이 인사로.

    - 사요나라.

    엉엉.

     

       얏치는 남겨졌다.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남겨졌다. 친구 앗치와 함께 길을 걷다가 조금 앞서 걸었는데, 등 뒤로 바람이 불었다. 얏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자신이 또다시 홀로 남겨졌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얏치는 남겨졌지만, 이번에는 10년 전과는 달랐다. 여전히 슬펐지만, 그랬지만, 여자는 앞으로 살아갈 힘을 얻었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꿈을 잃지 않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 당신 만나서 좋았어. 같이 지낼 수 있어서 좋았어.

     

       이별의 순간,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 '이별의 곡'이 흘렀다. 아, 이건 현재를 더 소중히 여기라는 드라마였다.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이야기였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격려하는 드라마였다. 좋은 드라마였다. 또 이런 드라마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Y언니랑 나는 세계맥주 잔을 부딪혔다. 힘내자, 우리.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어떤 이유로든 남겨진 우리들, 힘내자.

     

       여름, 바람이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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