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8월 24일 월요일
    모퉁이다방 2009. 8. 24. 21:53

        집으로 오는 지하철 안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엠피쓰리 플레이어는 고장났고, 읽을 책은 가방 안에 두 권이나 있었는데,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하철 안에는 사람들도 많고, 배도 고프고. 이제 을지로 입구구나, 이제 신당이구나. 아무 생각없이 멍하게 서 있었다. 아. 왕십리에서는 얼마 전에 먹은 아이리쉬 포테이토 생각을 했다. 그 때는 칠리 소스를 먹었는데, 다음 번에는 느끼한 소스를 먹어야지, 생각했다. 아. 문자도 주고받았지. Y언니는 분노의 껌을 씹고 있다고 했고, B씨는 내게 지조를 지키라고 했다. J동생은 순대떡볶이를 먹으러 가자니깐, 공부하러 도서관에 간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아이다. 

        7호선으로 갈아타면서는 반찬을 사야지, 생각했다. 집에 남은 피망이 있으니, 잡채용 돼지고기를 사서 간장 양념을 해서 볶아 먹을까. 그러면 양파나 당근을 조금 사야지. 시장에서 밑반찬도 사자. 요즘 애호박이 싸던데, 송송 썰어서 밀가루에 계란 묻히고 구워먹으면 맛있겠다, 라는 생각들. 반찬 생각을 하니 주린 배가 더 푹 꺼져서 과연 시장까지 걸어갈 수나 있을까 염려되었으나, 오늘 시장을 안 가면 내일 도시락 반찬을 싸갈 수가 없으니 갔다. 마트에 가서 잡채용 돼지고기를 샀다. 흙당근도 딱 하나만 샀다. 시장을 걸어나오면서는 3개에 천원하는 빵 세 개를 샀다. 이건 내일 간식해야지. 비싸서 매번 살까 말까 했던 호두도 오천원치 샀다. 두부 가게에 오늘 J씨가 반찬으로 싸온 고추부각이 있었는데 (진짜 맛있었다) 참았다. 밑반찬도 사야 하니까. 시장 초입 반찬 아저씨에게 들러, 고추 반찬만 산다는 게, 무말랭이도 많이 주신다는 말에 고추 반찬 삼천원치, 무말랭이 이천원치를 샀다. 안경점 아저씨를 피해 횡단보도를 건너, 집으로 왔다. 

       렌즈를 빼고, 눈화장을 지우고, 손을 씻고. 냉동실에 있는 멸치를 꺼내 마른 팬에 볶았다. 이래야 멸치의 비린 맛이 안 난단다. 볶은 멸치를 잠시 치워두고, 기름을 두르고 채 썬 마늘을 넣었다. 마늘 익는 냄새가 기분 좋게 풍겼다. 거기에 다시 볶은 멸치를 넣고, 씻어둔 호두를 넣고, 간장 양념을 넣었다. 커다란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주면서, 아저씨에게서 산 반찬들을 통에다 넣었다. 아저씨는 월요일이랑 목요일날 오시니까, 다음주 월요일에는 오징어 젓갈을 사야지. 돼지고기 반은 냉동실에 넣어두고, 반만 간장 양념했다. 굴소스도 한 숟갈 넣었다. 후추도 약간 뿌렸다. 당근도 반만 썼다. 잘게 채 썰어, 피망만 함께 넣어두었다. 이건 내일 일어나자마자 요리해서 반찬으로 싸가야지. 멸치 볶음 불을 줄이고, 요리당이랑 깨소금을 넣고 보니, 어째 이건 내가 봤던 요리의 색깔이 아니다. B씨의 어머니가 싸 주셨던 반찬은 이리 탁하지 않았는데, 맑았는데. 비싼 호둔데. 맛있어야 하는데. 

        세수를 하고, 아까 사온 베지밀을 커다란 컵에 따랐다. 그리고 친구가 싸 준 생식가루 두 개를 탈탈 털어넣었다. 요리를 하고 나니, 입맛이 없어졌다. 베지밀을 두 개나 따랐더니 너무 양이 많아 꾸역꾸역 겨우 마셨다. 컴퓨터 앞에 앉아 한RSS로 들어갔다. 여긴 내가 좋아하는 블로그들의 리스트들이 수 십개 있는 곳. 새 글이 올라오면 새 글이 올라왔다고 알려준다. 역시 모두들 그 분 이야기다. N님의 글을 읽고는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아. 지하철에서 또 내가 한 짓이 생각났다. 제천의 동영상을 본 것.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의림지에서 제천 시내로 가는 시내버스 안에서 제천 외곽의 풍경을 담았다. 1분 44초 영상인데, 버스 창가에 손을 내밀고 찍은 영상이다. 그 1분 44초 속엔 제천의 나무가 있고, 제천의 하늘이 있고, 제천의 신호등이 있고, 제천의 집이 있고, 제천의 차가 있고, 제천의 바람이 있다. 온통 파랗고, 푸르다. 그 날의 온전한 기운을 1분 44초동안 느낄 수 있다. 이걸 보고 있으면 1분 44초 동안 입꼬리가 올라간다.

        또. 어젯밤엔 잠이 안 와서 박민규의 소설집을 읽기 시작했는데, '카스테라'를 읽고선 뭐랄까. 마음이 따뜻해져 버렸다. 마지막 냉장고 안에 한 조각의 카스테라가 놓여져 있었을 때, 그걸 아이가 발견했을 때, 아이가 그 카스테라를 깨물었을 때, 그리고 그 문장을 읽을 때, 눈물이 찔끔 났다. 그래, 그래. 얼마 전 박민규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 갔는데, 작가님이 그러셨다. 아주 무시무시한 말이었는데,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언젠가 마흔 두 살의 나이가 됩니다.' 이 말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마흔 두 살이란 나이가 무시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 나이 지금 서른. 마흔 두 살이 되려면 십 이년이 남았는데, 사실 그보다 훨씬 덜 남았지만. 이렇게 별 볼 일 없이 늙어갈까봐. 그래서 별 볼 일 없는 마흔 두 살이 될까봐. 그래서. 그 말이 무시무시했다. 뭔가가 조금씩 그리고 많이 걱정되는 밤이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