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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알지도 못하면서 - 고순이 언니, 최고로 멋져요!
    극장에가다 2009. 6. 13. 14:19

     


        5월에 본 영화. 지금은 벌써 6월의 둘째 주 주말. 영화를 함께 보러 간 우리 셋은, 영화를 보기 전 5월의 중국집에서 새우볶음밥 따위를 먹으며, '강간범'을 연기한 그가 출연하는 영화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강간범'을 연기한 그가 쓴 소설 한두 권쯤은 읽었고, '강간범'을 연기한 그를 사모하기까지하는 사람 셋 정도는 모여서 봐줘야한다고, 그래야 손발이 오그라들어도 서로 눈을 마주치고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강간범'을 연기한 그가 쓴 소설 한두 권쯤 읽었고, '강간범'을 연기한 그를 사모하기까지하는 우리 셋은 중앙시네마 스폰지하우스 앞좌석에서 나란히 앉아 이 영화를 봤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날은 즐거웠다. 중국집에서 본 오늘의 운세 문구가 아주 좋았으며(셋 중 내꺼만), 맛있는 국수도 먹었으며, 맛있는 커피도 반값 할인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화가 아주 재밌었다. 2시간 동안 정말 깔깔거리면서 잘도 봤다. 재밌었다.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아주 좋아하거나, 아주 싫어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이번 경우에는 아주 좋은 경우. 빛나는 배우들이 줄줄이 나와주시니 일단 눈이 즐거웠고, '강간범'을 연기한 그의 연기도 몇몇 장면을 제외하곤 아예 못 봐 줄 (죄송해요. 전 당신을 사모하는 독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눈알 돌리는 장면은, 생각보다 아주 길어서,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손발이 오그라들었어요. 흑흑-) 정도는 아니었다. 

        그 날의 다이어리에는 이런 말들을 썼다.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구나. 제천도, 제주도도. 사람들도 다들 비슷하구나. 제천의 사람들도, 제주도의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강간범'의 흥행감독이 나이가 들면 제주도의 양선생님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가장 빛났던 캐릭터는 역시 고순이, 고현정. 그런 생각도 했다. 고현정이 홍상수의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 여자 캐릭터에 점점 멋지게 변하기 시작했다고. 홍상수 영화 속에서 고현정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두 영화 뿐이긴 하지만) 강하다. 단단하다. 씩씩하고, 멋지기까지 하다. (아, '선덕여왕'에서도 그렇더라. 완전 멋진 연기. 캭!) 닮고 싶고, 부럽기까지 하다. 정말 그렇다. 그 전의 여자들은 뭐랄까, 홍상수의 찌질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쿨한 척하지만 속내가 그렇지만은 않은, 속물적인, 계산적인, 혹은 지나치게 남자에 못 매다는(예지원, 지못미) 캐릭터들이었던 것 같은데, 고현정이 맡은 역할들은 뭐랄까, 정말 멋지다. 멋진 언니구나, 닮고 싶구나, 쿨하구나, 건강하고 예쁘구나, 인생을 아는 참된 언니,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뭐. 남자들은 여전히, 변함없이 찌질하고. 어째 멋진 언니 옆에 있으니 더 찌질해보인다.

        흠. 오늘은 내가 사는 곳이 제주도였음 좋겠다. 서울이나, 제천이나, 제주도나 사는 모습이나 사는 사람들의 행태는 다 비슷비슷하지만, 제주도의 풍경은 우월하게 아름답다. 영화 속 제주도도 그랬다. 바닷바람에 양선생님의 새빨간 티셔츠가 나부끼는데, 꼭 임신 7개월 즈음인 것 같은 양선생님의 뱃살마저도 아름다웠다. 오늘은 김태우가 찌질하게 도망갔던, 이 길로 쭉 오백미터만 가면 바다가 나오는, 그 울퉁불퉁한 돌길을 터벅거리며 걸어보고 싶다. 바다로 이어지는 길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아도 바다내음새가 솔솔 풍겨오겠지. 이제 곧 바다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그 길을 덜컹거리며 걷고 있으면, 어느새 펼쳐질 제주도의 아름다운 바다. 캬. 고순이 언니가 고 바닷가에 앉아서 변함없이 찌질한 김태우에게 쿨하게 건넨 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요런 말 따위를 쿨하게 내뱉으면서, 질릴정도로 (과연 질릴까?) 남쪽의 바다를 감상하고 무심한 손짓으로 엉덩이에 묻은 샛노란 모래를 툭툭 털고 일어나, 내 갈 길을 가고 싶다.

        아, '강간범'을 연기한 배역명은 '흥행감독'인, 손발이 오그라드는 눈알 굴리기의 고수이신, 그 분은 엘르 6월호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계속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좋은 삶이라는 건 없다. 그냥 살아가는 일만 있을 뿐이다. 해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더 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불안해 하지 않고 그냥 우연을 즐길 것이다."  이렇게 '강간범'을 연기한 그 분은 찬란한 6월에, 20대의 청춘에 대해 말했다. 걱정마시라. 우리 셋은 여전히 그의 열렬한 팬이니까. 6월호 엘르에 그의 글이 실렸다는 소식은 미용실에서 고 잡지를 뒤적거렸던 그의 또 다른 팬(B양)의 신속한 제보로 알게 됐다. 내가 사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함께 영화를 봤던 H양은 술에 취해 집에 귀가하는 길에 불현듯 충동구매를 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 복사해서 나눠줬다. 함께 영화를 봤던 또 다른 J양은 시청거리에서 '그 분'을 보낼 때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가방 안에 가지고 있었다. 나는 말할 것도 없지. 우리는 여전히 그의 팬이고, 그의 글을 사랑한다. 이제는 가끔씩 중국집에서 새우볶음밥을 먹으며 깔깔대며 이야기할 장면들이 생겼으니, 그에게 감사할 뿐. 으하하. 빨랑 소설집을 세상으로 보내 주세요.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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