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심야식당 -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여는 식당
    서재를쌓다 2009. 4. 20. 00:43
    심야식당
    아베 야로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언니는 터키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그러니까 언니가 터키에 가기 전, 겨울의 홍대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 날 우리는 소문난 맛집 앞에서 몇 십분을 기다린 뒤, 일본식 덮밥을 먹었고, 튀김을 파는 술집에서 맥주와 바삭바삭한 튀김을 안주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 날, 언니가 내게 추천해준 책이다. 언니도 아직 보지 못했는데, 좋다더라는 말을 듣고 내게 추천해줬다. 언니는 항상 무슨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 이름을 길-게, 끈적하게 부른다. 아무개야. 심야식당이라는 만화책이 있대. 밤 12시부터 아침이 될 때까지만 여는 식당인 거야. 세상사에 지친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가는 곳이래.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언니는. 겨울의 일이니까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워낙에 난 기억력이 없으니까. 이건 추측인데, 언니는 그 곳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가서 술 한 잔 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생각한 말일 수도 있고. 

        언니는 터키에서 돌아왔지만 아직 만나지는 못한 봄. 교보에서 이 만화책을 샀다. 그 날은 뭔가를 꼭 사야만 할 것 같은 날이라, 그냥 들른 서점에서 빈손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 책이 생각나 샀다. 그리고 금방 읽어버리지 않고, 적당히 묵혀두었다. <심야식당>에 나오는 '어제의 카레'처럼 묵혀두고 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더 괜찮았다. 사실, 그림도 내용도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는 아니었다. 오히려 좀 실망했다. 난 이 만화책이 좀 더 감성적이고, 좀 더 그림이 풍성할 줄 알았는데. 그림은 썩 잘 그리지는 못했다는 느낌이다. 내용도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생각이 난다. 30분 안에 다 볼 수 있는 내용인데, 3일 내내 드문드문 <심야식당>의 손님들이, 마스터가 생각나서 집에 오면 괜히 한 번씩 들춰보곤 했다. 뭔가 있다. 이 만화에. 


        이 희안한 식당의 주인장님이시다. 모두들 이 분을 두고 마스터라고 부른다. 마스터 계란말이 하나 줘요. 마스터, 그 카레는 뭔가요? 마스터 고양이 맘마 되요? 이런 식이다. 얼굴을 보면 무슨 사연이 있을 게 분명하다. 그야말로 심야 식당.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만 여는. 메뉴에 상관없이 뭐든 시킬 수 있다. 그러니까 집에서 만들어먹는 그런 음식들. 간단하지만 가게에서는 팔지 않는 집밥스런 음식들. 이 식당이 우리나라에 있다면, 분명 마스터는 나는 간장계란밥을 주문했을 거다. 따끈따끈 김이 올라오는 새 밥에 간장이랑 참기름 듬뿍 넣고 계란 반숙으로 후라이해서 비벼 먹는. 딱 그런 식의 음식이 마스터의 손에서 만들어져 손님들의 식탁 위에 오른다.

       책의 표지에 메뉴판이 적혀져 있다. 14개의 음식 이름들이 적혀져 있는데, 만화책을 보고 나면, 이 메뉴들이 그냥 음식 이름처럼만 보이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이 음식들을 시켜 맛나게 먹었던, 식당을 거쳐갔던 손님들의 사연 하나하나가 떠오르는 거다. 그리고 이상하게 마음이 따스해진다. 신기하게도 그렇다. 그러니까 이런 손님들이다.

       조폭 류씨는 심야식당에 와서 문어모양의 비엔나소시지를 시킨다. 언제나. 그리고 언제나 계란말이를 시키는 게이바를 운영하는 코스즈씨와 친해진다. 류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란말이를 시키지 않고, 코스즈씨도 비엔나소시지를 주문하는 일은 없다. 서로의 것을 먹을 때, 가장 맛있다며 사이좋게 나눠 먹는다.

       이건 그야말로 '어제'의 카레. 마스터는 말한다. 카레란 자고로 하루를 묵혀둔 뒤에 먹어야 제 맛이라고. 따뜻한 밥에 적당히 식은 카레를 얹어 비벼먹어야 제 맛이라는 아는 사람만 아는 '어제'의 카레. 당근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잘게 썰고 (나도나도!), 야채는 많이 넣은 맛난 카레다. (카레, 완전 좋아하는 나 ㅠ)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 '소힘줄, 무, 달걀이 들어간 어묵'. 매번 사랑에 빠져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마유미씨는 미식가에 대식가. 마유미씨가 심야식당에서 즐겨먹는 음식은 '소힘줄, 무, 달걀이 들어간 어묵', 소힘줄로 맥주 한 잔, 무로 두 잔, 달걀 노른자를 소스에 풀고 공기밥 2그릇과 같이 세 잔을 먹는 게 마유미씨의 방식. 매번 이번이 마지막 만찬이라고 애원하지만, 늘 더 쪄서 이 식당을 찾는 마유미씨. 흐흐

        그리고 심야식당을 찾는 정겨운 단골들. 가다랑이포를 따뜻한 밥에 얹어서 간장을 뿌려서 먹기를 좋아했던 잘 안 팔'렸'던 엔카 카수 미유키씨, 낫토 국물을 좋아했지만 새로 사귀게 된 준씨 때문에 늘 국물 뺀 낫토를 주문했던 사랑하기에 체력이 너무 약한 당신, 요시다씨, 김을 먹어야 머리카락이 튼튼하다고 매번 주장하는 대머리 마야모토씨, 미디엄으로 구운 명란젓을 제일 좋아했'던' 신주쿠의 마릴린, 복싱에서 이긴 후에 항상 카츠돈을 먹으러 왔던 카츠씨, 나폴리탄을 먹는 나폴리 아이, 후리오, 남자 에로계의 최강 배우 일렉트 오끼씨가 즐겨먹었던 포테이토 샐러드, 오이절임을 씻어 통째로 씹어먹으며 맥주 마시기를 즐겼던 왕년의 프로레슬링 챔피언 료마씨, 한밤 중의 라면이 어울리는 복 없는 여자, 사치코씨까지.


       '심야'식당이지만, 절대 심야에 보면 안 된다. 뭔가 미친듯이 먹고 싶어지기 때문에. '수박' 에피소드에는 1권에 나오는 모든 손님들이 나온다. 여름이고, 우리의 단골들은 옛 생각이 난다면서 일부러 마스터에게 일부러 모기향까지 피워달라고 한다. 때마침 정전이 되어 주시고, 그렇게 앉아 도란도란 귀신 이야기를 나눈다. 수박을 한 통 사서 냉장고에 재워놓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심야식당의 수박 한 통을 나눠 먹는 장면. 그 정다움. 이 에피소드를 두 번 읽을 때, 나도 이들 틈에 끼여 앉아서 수박을 시원하게 한 입 깨물어 먹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최고 무서운 귀신 이야기가 뭐더라? 드라마 <스이까> 생각도 나고. 이제 여름이 다가올 테니까, 다시 봐줘야지. 그리운 식구들. <심야식당>은 3권까지 나왔다는데, 언제 한번 교보에 들러야겠다. 그냥 들어가서 빈 손으로 나오기 싫은 날, 2권을 사들고 나와야지. 마스터, 기다려욧. :D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