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BECK - 당신의 처음,
    서재를쌓다 2009. 3. 28. 03:12
    

        나는 그 분에게 브로콜리 너마저 노래를 정말 좋아해요,라고 말했다. 술자리에서, 아주 추운 겨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 분이 마이앤트메리 앨범을 샀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마이앤트메리를 더 좋아해요,라고 말했던 것 같다. 역시 술자리였겠지? 그리고 여전히 추웠을 거다. 그러자 어느날, 그 분이 내게 그럼 <벡>을 좋아할 거예요,라며 만화책을 추천해주셨다. 역시 술자리에서였겠지? 그렇게 <벡>을 보게 됐다. 물론 '그 분'이 빌려주셨다. 완결까지 모두 다 소장하신, 동생의 표현에 의하면 대단하신 분.

        그래. 정말 5권까지는 심드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빌려 보면서도, 뻔뻔스럽게 오래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5권이 넘어가니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잠 들기 전에 한 권 해치우고, 출퇴근 길에 지하철에서 두 권씩 봤다. '그 분'이 다음 권을 늦게 가져다주시면, 그 분과 나는 그리 친하지 않은데도 막 원래의 내 성격대로 큰 소리로 버럭거리며 재촉하고픈 느낌까지 전해준 나의, 아니 우리의(나로 시작해서 지금 2명이 '그 분'의 <벡>을 빌려 보고 있는 중) 벡. 벡. 벡.

        <벡>은 기타 코드 하나 잡을줄 몰랐던 유키오가 유명한 밴드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로 성장해가는 이야기다. 아주 작았던 꼬맹이가 34권이 되면 어른스런, 그렇지만 열정은 처음 기타를 잡을 때 못지 않은 뮤지션으로 성장해 있다. 기특한 유키오. 응. 그 아이의 이름은 유키오. 까만 머리에, 커다란 눈을 가진 착한 아이다. 진심이 통할 거라고 믿는 아이. 음악에도, 사랑에도. 그 아이가 노래하면, 모든 사람들이 놀란다. 그 노래를 듣고 있는 무대 밑의 관객들도, 관계자들도, 밴드 멤버들도, 에디도. 만화책이라 유키오의 노래소리를 직접 들을 순 없지만, 그 표정들을 보면 그건 착하고, 부드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강렬한 음색이란 생각이 든다. 어느새 내가 아끼게 된 아이. 

       이 만화책에 반한 건, 유키오가 처음 가사를 쓰게 되었던 장면에서부터였다. 중년의 아저씨들이 똑같은 복장과 표정으로 쏟아져나오는 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그 전철역에서 빠져나와 공허한 도로 위에 혼자 서 있는 순간, 유키오의 머리에 영감이 스쳐간다. 유키오는 생각한다. '삶과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정상이 아닌 건 오히려 나일지도 몰라'. 그렇게 완성된 가사는 물론 좋았다. 그 전의 가사처럼 어떤 그럴싸해 보이는 기교가 잔뜩 들어간, 화려하기만 수식어가 들어간 가사가 아니였기에. 유키오의 마음에서 우러난 솔직한 가사였기에.

       22권에는 이런 독백이 나온다. '바닥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으면 위로 올라갈 수 없지. 오른쪽으로 가 본 적이 없으면, 왼쪽으로 갈 수 없어. 절망해 본 적이 없으면, 정말로 소중한 게 뭔지 몰라.' 누가 한 말인지는 기록해두지 않았다. 그저 이 말이 좋아서 다이어리 귀퉁에 BECK 22권 중,과 함께 적어두었던 말. 어쩌면 굉장히 통속적인 말일 뿐인데, 그걸 읽는 내 마음이 찌릿했다. 그래, 맞아. 정말 그래. 맨 밑바닥을 치지 않으면, 오른쪽으로 가지 않으면, 절망해 본 적이 없으면 알 수 없어, 라고. 만화책을 보면서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제 마지막 34권을 따끈한 방에 누워서 보는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 이제 이 멋진 녀석들을 만날 수가 없다니. '벡'의 새 노래를 들을 수 없다니. 신기하게도 처음엔 그저 종이책에 불과했는데, 그래서 당연하게도 유키오의 노래소리도, 류스케의 기타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유키오가 노래만 시작하면 관객들이 뭔가 나사 빠진 표정을 지으면서 '와-'하는데 뭐야, 하고 웃음부터 났던 나였다. ㅠ) 이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정말.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으면, 어디선가 기타소리가 들리고, 유키오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으면, 어디선가 정말 듣자마자 손발이 오그라들고, 닭살이 돋는 최고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그래서 애니메이션도 보지 않을 생각이다. 내 머릿 속엔 이미 최고의 노래가 있기에. 이게 종이만화책 <벡>이 내게 해 준 최고의 선물 '상상'이다) 

       모두에게 'Devil's Way'가 있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Devil's Way'는 세계적인 밴드의 멤버였던 에디가 어느 날 일본에 있는 류스케에게 전화를 했다가, 유키오가 받자 그래 네게 들려주지, 하고 들려주었던 그의 마지막 노래였다. 그러니까 그 노래는 악보도 없고, 어떠한 기록도 남겨지지 않은, 유키오의 머리 속에서만,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선율이었다. 에디는 당시 최고의 뮤지션이었고, 그의 마지막 노래 'Devil's Way' 또한 무척 좋았다. 유키오가 더듬거리며 원더풀,이라고 반복해서 외쳤던 노래. <벡>은 에디가 남긴 그 미완성의 'Devil's Way'를 완벽하게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내서 현실의 무대 위에서 연주한다. 그리고 <벡>의 멤버 모두가 꾸었던 꿈. 이미 죽은,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뮤지션(존 레논 등등)들이 등장해 <벡>의 어마어마한 무대가 끝난 뒤 남겨진 쓰레기를 줍는 꿈은 현실이 된다. 드림즈 컴 트루.  'Devil's Way'. 나에게, 당신에게, 우리 모두에게 그런 'Devil's Way'가 있다. 나는 그렇게 아직까지도, 여전히, 변함없이 그렇게 믿고 있다.

        34권, 그러니까 완결편에서 유키오는 이렇게 말한다. 이 대사도 참 통속적이긴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심장을 찌릿찌릿하게 만들어줬다. '저기..... 한 마디 해도 될까?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고, 유우지도, 타이라도, 류스케도, 말할 것도 없이 치바도(여기서 울컥하는 거다. 속 좁은 치바. 그렇지만 제일 정 많은 치바. 아, 난 치바를 좋아했다우)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야. 그러니까... 으~음 저기... 어라, 갑자기 뒤죽박죽됐다... 내가 무슨 말 하고 싶어하는건지 알겠어?' (이건 내가 자주 하는 말인데. 샤바샤바샤바거리다, 아 씨. 횡설수설인데,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러면 내 친한 친구는 씨익, 웃으면서 알아, 그런다.) 그러니까, 류스케도, 타이라도, 유우지도, 말할 것도 없이 치바도 모두 알아 들었다. 그건 걔네들이 바로 <벡>이라는 이야기다. 

       또 다시 34권. 이런 장면도 있다. 타이라가 유키오의 등 뒤에 살포시 손을 올리며 나가자고, 하는 장면. 이들은 태풍이 쏟아지는 가운데서 공연을 마친 상태였고, 관객들은 그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하고 계속해서 목이 터져라 앵콜을 외치고 있는 상태였다. 그 날, 유키오는 그야말로 '떼창'을 듣게 되는데, 그 순간 무대 위의 유키오의 표정을 잊지 못하겠다. 그건 보통 유키오가 노래하기 시작하면 쳇, 니가 하면 얼마나 하겠어,라고 표정으로 팔짱 끼고 서 있던 관객들이 일제히 짓는 표정인데. 그러니까 그런 표정이다. 마침내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어,라는. 타이라가 땀에 흠뻑 젖은 유키오의 등 위에 손을 올린 순간, 유키오의 심장은 찌릿한다. '촉감'이라는 독백이 나온다. 창피하게 눈물이 나올 정도로 따뜻한 '촉감'란 표현이겠지? 그건 그들이 영원히 <벡>이라는 거고, 고물차로 이동하며 생사를 함께 하는 멤버라는 거고, 서로의 'Devil's Way'라는 거겠지. 

        아. 아. 너무 근사한 만화였다. 유키오, 벡, 잊지 못할 거다. 내 앞에는 지금 그렇게 성장한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들이 많으니깐. 그들을 보면 그들의 처음,인 유키오와 벡이 생각날 테니까. 욕심도, 열정도, 욕망도, 질투도, 우정도, 믿음도 넘치도록 많았던 <벡>. 그네들의 최고의 노래들이 아직도, 아니 여전히 내 머릿 속에서 또렷하게 연주되고 있으니까. 누군가, 특히 성공해버린 누군가 자신들의 처음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 만화를 보시길. 당신의 처음이 또렷하게 기억날 테니까.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