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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속 스캔들 - 청하도 원츄, 과속 스캔들도 원츄
    극장에가다 2008. 12. 8. 22:09

       일요일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아빠 심부름이었다. 나는 축의금이 잘못 전달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신부의 아버지 성함이 적혀진 모니터 아래에서 몇 번을 확인했다. 수첩에 적어온 세 글자랑 하나하나 대조해가면서. 신부는 날씬했다. 나는 축의금을 내고 식권 한 장을 받았다. 아빠에게 전화를 해서 잘 전달했다고, 그런데 신부는 몇 살이냐고 물어봤다. 아빠 곁에 있던 엄마가 너보다 한 살 어리다,고 말씀하셨다.
     
        바로 피로연장에 올라가기가 그래서 나는 문 쪽이랑 가까운 신랑측에 앉아서 식이 진행되는 걸 지켜봤다. 지루한 주례사가 끝나고, 신랑이 신부를 위해 직접 노래를 불러줬다. 그토록 바라던 시간이 왔어요, 로 시작하는 노래였다. 새신랑의 삑사리에 하객들은 웃고, 새신부는 울었다. 사회자가 갑자기 하객들에게 만세 삼창을 시켰다. 원래 신랑이 하지만, 반대로 해보죠. 신랑측에서 만세 삼창을 하면, 신부측 하객들이 만세 삼창을 하고, 그 다음에는 다 같이 하는 거예요. 일요일 오후, 그것도 눈이 오는 일요일 오후에, 나는 하객들의 만세 삼창을 들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혼자라고 했더니 갈비찜을 거의 다 먹은 테이블로 안내해줬다. 나는 갈비찜때문에 화가 났지만, 참았다. 대신 갈비탕을 맛나게 먹었다. 해파리 냉채도 있었고, 대나무 통밥이었고, 전도 있었고, 새우튀김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맛이 없었다. 그래도 자리에 끝까지 남아서 떡이랑 과일까지 젓가락으로 콕콕 쑤셔 먹었다. 옆에 놓인 맥주도 한 잔 하고 싶었지만, 차마 혼자서는 그럴 수가 없더라.

       그리고 강변에 가서 테크노마트 지하 LG전시홍보관에서 영화 예매를 했다. 지태씨가 나오는 <순정만화>가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마땅치 않아 입소문이 좋다던 <과속 스캔들>을 예매했다. 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 남았다. 동서울 터미널 역 앞 헌혈의 집이 생각나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강변역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320ml의 피를 뽑았다. 나는 건강해서 헌혈할 때마다 피가 철철 나온다. 사은품으로 영화관람권 한 장을 받고, 초코파이랑 쥬스 두 장을 마시고, 헌혈증서를 받았다. 

        1시간동안 극장 통로에 앉아 책을 읽었다. 김숨의 <철>을 읽고 있다. 꽤 재밌어서 거의 다 읽었다. 통유리창으로 오후 해가 반짝거렸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싶은 느낌이 드는 오후였다. 친구에게 연락을 했더니, 영화보는데 부르지 않았다고 문자가 왔다. 영화 보기도 좋은 날인데, 친구가 그런다. 맞다. 어제는 영화 보기도 좋은 날이었다. 뚜레쥬르에서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뷁이었다. 쓰고 탄 맛만 났다. 분위기 잡을려고 그랬는데 실패. 커플들로 그득한 극장 안에 혼자 뚜벅뚜벅 들어가 앉아선 <과속 스캔들>을 봤다.

        과연 영화는 재밌었다. 입소문이 날 만 했다.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결심한 건 한 영화 기자의 블로그의 글을 보고나서였다. 뻔하고 유치하고 재미없을 게 분명할 거라고 생각했던 듣보잡인 <과속 스캔들>이 의외로, 꽤, 잘 만든 코미디 영화였다는 글이었다. 음악도 적절하게 잘 쓰였고, 감독은 아역배우를 어떻게 다룰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기자분 말이 다 맞았다. 음악도 좋았고, 아역배우의 연기도 딱 좋았다. 차태현과 박보영의 연기도 좋았다. 설정자체가 좀 그렇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꽤 자연스럽다. 억지스럽게 웃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웃긴다. 그리고 마지막엔 짠해진다. 결말은 물론 해피엔딩이었고, 따뜻했다. 눈오는 날 보기에 딱 좋은 영화였다. 모두에게 강추.

       영화를 보고 나서 휴대폰을 켰더니 친구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우린 크림 생맥주가 맛난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아주 예쁘게. 드디어 겨울이 온 것이다. 무척 추운 날이었다. 나는 맥주를 먼저 마시면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이 순간이 아주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놓인 맥주잔, 창 밖에 내리는 눈, 더할 나위없이 친절한 사장님께서는 무릎담요와 난로를 가져다 주셨다. 친구가 왔고, 우리는 맥주도 마시고 나중에는 청하도 마셨다. 헌혈을 하고 술을 이딴 식으로 마시다니 나도 간이 배 밖으로 뛰어나온 아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으니 나는 아주아주 건강한 아이다. 

       오늘은 어제 함께 한 친구와 겨울에 봤던 영화들을 생각했다. 죄다 DVD로 집에 모셔두고 싶은 영화들. 그래서 추운 겨울날 귤 까먹으며 틀어놓고 훌쩍거리고 싶은 영화였다. 그러다보면 따스해지는 영화. 오뎅바의 정종같은 영화. 우리가 함께 본 영화는 아주 많았지만, 지금 생각나는 영화는 김호정이 나왔던 <꽃피는 봄이 오면>. 바닷가에서 트렘펫 소리를 듣는 김호정의 표정을 봐야한다. 그 바닷가의 어둑어둑한 분위기. 누군가를 그리워해본 사람은 다 아는 표정. 그리고 <우리, 사랑해도 되나요?>. 이건 엄마 영화다. 사라 제시카 파커가 임신했을 때의 엄마 사진을 가족들에게 선물해주는 장면에서 가족들의 표정. 이별을 준비 중인 사람이라면 다 아는 표정. 이건 정말 슬프다.

       겨울이 되니 매일매일이 술이다. 그리고 매일매일 누군가가 그립다. 어떤 날은 전화만 하면 금방 달려나올 사람이 그립기도 하고, 어떤 날은 전화를 하기가 망설여지는 사람이 보고싶기도 하다. 또 어떤 날은 전화번호도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전화번호를 알지만 절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아. 그리고 청하가 맛있어졌다. 아주 오래전 포장마차에서 마셨던 청하는 최악이었는데, 밍밍해지니 딱이다. 소주는 부담스럽고, 맥주는 배부른 날에 원츄. 아아. <과속 스캔들>도 원츄.

       아. <그세사> 할 시간이다. 닥본사. 닥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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