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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몽 - 고마운 꿈. 그래서 슬픈 꿈
    극장에가다 2008. 10. 12. 17:28
    이건 스포일러 덩어리예요. 


       <비몽>을 봤다. 슬픈 꿈 이야기. 나도 꿈을 꾼다. 어느 날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옷을 입고 있는데, 나 혼자 벗은채 허둥대고 있는 꿈을 꿨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부끄러운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경우에만 좋은 꿈이란다. 나는 그런 꿈을 꿀 때마다, 매번 부끄러웠다. 어떤 날은 야한 꿈도 꾸고, 어떤 날은 뱀이 우글거리는 꿈도 꾼다. 그리고 너를 만나는 꿈도 꾼다. 며칠 전에 그런 꿈을 꾸고는 정말 우연히 지하철에서 너와 만났다. 나도 예지몽이란 걸 꾸는 구나, 신기했던 날이었다.
     
       아무튼 <비몽>을 봤다. 오다기리가 꿈을 꾼다. 대부분 헤어진지 얼마 안 된 여자와 만나는 꿈이다. 그래서 오다기리는 꿈을 꿀 때 행복하다. 그건 현실과 다르니까. 이나영은 오다기리가 꿈을 꾸는 그대로 행동하는 몽유병 환자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이건 영화니까, 그리고 김기덕 영화니까. 이나영은 헤어진지 얼마 안 된 남자를 찾아간다. 그건 이나영에게 아주 끔찍한 일이다. 그녀는 그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기 때문에. 남자와 만나서 사랑하는 행위를 하는 이나영은 불행하다. 그건 현실과 다르니까. 

       그러니까 장미희가 말한다. 흑백은 같은 세계예요. 한 사람이 행복하면, 한 사람이 불행해요. 두 사람은 하나군요. 둘이 사랑해봐요. 그 장면에서 나는 요즘 읽고 있는 책의 몇몇 구절을 떠올렸다. "그 충격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그 말을 듣기 이전의 밝은 세계에서 내가 영원히 추방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다음은 믿을 수 없는 일들로만 가득한 어둠의 세계, 나 자신도 신뢰할 수 없는 밤의 세계였다." 그리고 이런 문장도 있다. "해가 저물 때까지 나는 그 두 바다를 동시에 바라보면서 두 개의 세계에 대해 생각했다. 낮의 세계와 밤의 세계.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돌아오면 시내의 화려한 불빛들이 또 견딜 수 없이 공허했다. 진실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들이 환영에 불과했다."

       내게 김기덕 영화는 늘 극단적이다. 아름답거나, 견딜 수 없거나. 나는 <비몽>에서 이 두 가지를 모두 경험했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면서, 이나영은 왜 꽥꽥 소리만 지를까, 아니 잠을 안 자려면 그냥 간단하게 약을 먹어보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그 아름다운 장면이 나왔다. 갈대밭씬이었다. 네 배우가 한 앵글에 들어온 씬이었다. 오다기리와 이나영은 각각 반대편에 서서 자신의 분신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남자는 너무 사랑해서 집착하고, 여자는 그 사랑에 숨 막혀 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 사랑이 너무 힘들어 못해먹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여자가 갈대밭 안으로 꺼이꺼이 울며 사라져버렸다. 남자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이나영이 여자를 쫓아갔다. 울지 말라며 함께 울어 주었다. 여자의 벗겨진 구두를 신겨 주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니 여자가 울음을 그쳤다.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다기리도 신발을 신겨 주었다. 남자를 안아 주었다. 그러니까 그건 내 신발을 내가 신는 것이고, 내 눈물을 내가 닦아내는 것이다.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는 정말 딱 한 장면, 이 아름다운 장면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식대로 영화 스토리를 바꿔 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읽고 있던 소설 속 구절과 이어지는 이야기다. 오다기리와 이나영이 함께 절에 가는 씬이 있다. 함께 종소리를 듣고, 돌을 쌓아 올리며 소원을 빈다. 오다기리가 마지막 돌을 쌓아올리고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비는 순간. 이나영이 사라진다. 갑자기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 장면까지. 그 후의 영화를 나는 내 식대로 생각해버렸다. 이나영은 오다기리의 환영이였다고. 실연의 상처가 너무 아파 오다기리 자신이 만들어낸 자신의 분신이라고. 겉모습이 다른 도플갱어라고. 그래서 상처가 아물 때까지 함께 있어준 거라고. 마음이 편안해졌으니 이제 사라진 거라고. 언제고 견디기 힘들어질 때 다시 나타날 사람이라고. 그렇게 힘든 밤을 함께 견뎌줄 내 안의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아름다운 영화가 되었다. 전혀 불편하지 않은. 

        아주 오래 전 꿈인데, 내 얼굴에 유리조각이 박혀 여기저기서 피가 쏟아져 내리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날카로운 쇠 야구방망이 소리가 쨍,하고 울렸던 바로 뒤의 일이었다. 나는 아파서 울었지만, 이제 이게 끝이라는 걸 알았다. 꿈 속인데도 나는 그걸 알았다. 이제 나는 이 꿈을 꾸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될 거라는 걸. 다른 마음으로 살아갈 거라는 걸. 나는 그 후의 삶이 두려워, 한 발자국을 나아가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징징대고 있던 사람이었다. 꿈 속의 나는 그 유리조각을 하나하나 제 손으로 빼냈다. 아팠지만, 이제 나는 강해질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런 꿈도 있다. 깨어난 후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을 엉엉 울고, 나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한 발자국 나아간 사람이 되었다. 아문 상처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 꿈이 정말 고마웠다. 그래서 아직도 그 꿈을 기억한다. 아마 평생 기억할 거다. 고마운 꿈. 그래서 슬픈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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