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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비령 - 2천 5백만 년 전 당신에게
    서재를쌓다 2008. 8. 19. 14:42
    은비령
    이순원 지음/굿북(GoodBook)


    2천 5백만 년 전 당신에게


       이건 2천 5백만 년 전의 당신에게 보내는 글이지만, 2천 5백만 년 후의 당신에게 보내는 글일지도 몰라요. 겹겹이 쌓여있는 영겁의 시간을 지나 우리가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나는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어제는 장맛비가 한참을 내리고 오래간만에 맑은 날씨였어요. 비 개인 뒤의 이런 날이라면 별들이 평소보다 1미터쯤은 가까이 다가와 있을거란 생각을 했지요. 나는 별을 자주 보지 않는 사람이예요.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어버렸지요. 어제는 고깃집이 즐비한 큰 길가를 지나 중랑천에까지 걸어 나갔어요. 이곳이 내가 사는 곳보다 별이 좀 더 보이는 곳이죠. 별을 자주 보지 않는 나도 그쯤은 알아요. 나는 선 채로 고개를 젖히고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작가의 말이 생각나 풀밭을 찾아 그대로 뒤로 벌렁 누워 버렸어요. 아, 정말 밤이 한 눈에 넓게 들어오더군요. 서울이란 곳은 별자리를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밝은 곳이라 그저 몇 개의 별 뿐이였지만, 그럼 어때요. 나는 밤을 이렇게나 넓게 올려다보고 있는 걸요. 밤하늘을요. 별들을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어요. 모든 사랑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하지요. 여자는 남자의 옛 친구의 부인이고, 남자는 여자의 남편의 옛 친구예요.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는 으레 이런 조건을 포함하고 있지요. 남자는 중국의 돈황까지 가서야 장거리 전화를 걸어 여자의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여자는 누군가를 잊고 누군가와 시작할 수 있을까, 눈이 쌓인 은비령으로 가는 위태로운 고개들을 넘으며 생각을 해요.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사랑은 가질 수 없기에 더 간절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은비령>은 사랑이야기예요. 늦게 찾아왔지만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싶고, 고민 없이 눈앞에 보이는 이 길에서 우회전을 해 함께 바다를 보고 싶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시간이 2천 5백만 년 전에도 반복되었던 시간이라면 2천 5백만 년 후에도 역시 당신과 그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는, 나와 당신의 공전궤도가 닮아 일 년에 한 번쯤은 만나 후회 없이 사랑을 나눴으면 하는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 중국의 길고 긴 사막길의 실크로드 위에서야 여자를 깊이 사랑한다고 느꼈던 남자나, 만날지도 모르면서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은비령으로 길을 나섰던 여자나 무척이나 외로운 사람들이였던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어제 <은비령>을 읽었어요. 폭염주의보가 한반도 어디엔가 내려졌다는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요. 어제 나는 소설 속 남자를 따라 강원도 한계령까지 갔어요. 도심의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운전석의 남자가 씨디 플레이어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엔야의 노래가 흘러나왔어요. 그 순간, 정말 거짓말같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요. 새하얀 눈이 흩날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은비(銀飛). 남자가 중얼거렸어요. 은비령으로 가지. 그렇게 은비령으로 가게 된 거예요. 44번 국도를 타고 한계령 정상에서 인제로 빠지는 갈림길에서 나는 남자가 건네준 김이 모락모락나는 호빵과 캔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눈이 소복이 쌓인 비밀스런 고개 마루가 나타났죠. 은비(隱秘). 그 곳에서 나는 남자와 남자가 나중에 데려온 여자와 함께 별을 보았어요. 77년 만에 나타난다는 핼리혜성. 이생에서 더 이상 이 혜성의 반짝이는 꼬리를 올려다보는 일은 없겠죠. 우리는 그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2천 5백만 년 뒤에도 이렇게 핼리혜성의 반짝이는 꼬리를 올려다보며 이생에선 이게 다겠죠, 라고 생각 할 거라고. 우주를 생각하니, 그 까마득한 어둠을 생각하니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더라구요. 한 여름인데도 말이예요.

       2천 5백만 년 전의 당신, 아니 2천 5백만 년 후의 당신. 나는 어제 한 여름의 풀밭에 벌러덩 누워 밤하늘을 넓게 올려다보는 동안 지금의 나와 어쩌면 2천 5백만 년 전의 나와, 그리고 2천 5백만 년 후의 나를 생각했어요. 강원도 어느 곳에 있다는 은비가 내리는, 비밀스런 고개 은비령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어쩌지 못해 2천 5백만 년 후를 기약했을 가여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생각했어요. 그러자 외로워졌어요. 이렇게 혼자 풀밭에 누워있는 나도, 산 속 깊이 숨어있던 외로운 고개 은비령도, 어쩌지 못하는 사랑에 머뭇머뭇 손을 잡지 못했던 남자와 여자도, 깜깜한 어둠 속에서 혼자서 힘들게 타원형을 그리며 공전하는 별도, 내리자마자 스르르 녹아버리는 3월의 눈도, 얼음 사이를 뚫고 올라오는 독이 가득한 예쁜 이름의 꽃, 바람꽃도. 우리 모두는 우주 아래 외로운 존재인 거예요. 그렇지만 다행이지요. 우리에겐 2천 5백만 년 전의 외로움과 2천 5백만 년 후의 외로움이 있으니. 그건 누구나 겹겹이 쌓인 영겁의 시간이 지나도 외롭다는 거잖아요. 얼마나 다행이예요. 혼자 외로운 게 아니니.

       나는 2천 5백만 년 후에도 은비령을 만나고 있을 거예요. 밤하늘도 올려다보겠죠. 여전히 별이 별로 없는 도심의 무심한 하늘 아래일 지도 몰라요. 땀을 뻘뻘 흘린 뒤 강바람에 얼굴을 식히며 눈을 감고 은비령의 눈을 그릴지도 모르죠. 책 속에만 있었지만 이제는 땅 위에 존재하는 이름, 은비(銀飛)령. 작가 혼자 외롭게 스쳐 지나가는 별들의 이름으로 만들어냈지만 이제는 모두가 소리 내어 불러주는 이름, 은비(隱秘)령. 소리 내어 보면 참 예쁜 이름이예요. 나는 잔디밭에서 일어나 옷을 털면서 알았어요. 내 옷이 하얀색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렇게 오래 누워 은비령에 다녀오는 동안 하얀 티셔츠 가득 연둣빛 풀물이 올랐다는 걸.

        소설 속 별을 보는 뒷집 남자가 내게 해 준 말. 정말 위로가 되는 말 아닌가요. 나는 지금 엔야를 듣고 있어요. 정말 별들이 1미터쯤 위에서 속삭이는 것 같아요. 외로워하지 말아요.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그럼, 2천 5백만 년 뒤에 다시 만나요, 우리. 안녕.

                                                                                                                              2008년 7월

     


     
    - 이순원의 단편 은비령이 단행본으로 나왔다. 어울리지 않는 일러스트나 지나치게 큰 글자크기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다시 한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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