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아오이가든 - 때를 밀어야겠다
    서재를쌓다 2008. 8. 12. 15:10
    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문학과지성사


       돌아보니 시퍼런 마을이 있다. 하나의 저수지(첫째, 둘째, 셋째가 산다), 하나의 아파트(그 곳엔 개구리비가 내린다), 하나의 맨홀(임신한 어른의 배를 가진 아이가 있다), 하나의 동굴(빨간 터틀넥을 입은 여자의 시체), 하나의 세탁소(그는 하얀 양말을 신은 발로 금붕어를 터뜨려 죽인다), 하나의 박람회(개와 아이가 피를 흘리며 싸운다), 하나의 숲(고양이를 약으로 먹는 할머니가 있다), 하나의 방(친척의 아이를 낳은), 하나의 강(토막난 시체들이 차례로 낚여지는)으로 구성된 아오이 마을. 그런데 희안한 일이다. 피와 쥐, 구더기들이 난무하는 이 마을을 굽이굽이 지나쳐온 내 몸에 한 방울의 피도, 한 마리의 구더기도 옮겨 붙지 않았다. 깨끗하다. 배를 갈라 자궁을 싹뚝 잘라내 베란다 너머로 버리는 수술대 바로 옆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있는대로 숙이고 들여다봤는데도 내게는 피 한방울 튀지 않았다.

       그런 꿈을 계속해서 꾸었던 적이 있다. 도망가야 하는 꿈. 달아나야 하는 꿈. 그런데 내 몸이 꼭 매트릭스의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던 꿈. 모두가 슬로우 모션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꼭 그런 꿈에서는 나만 슬로우 모션이다. 지각하는 꿈. 꼭 입어야 할 옷이 없어 내내 그 옷만 찾으며 발을 동동 굴리다가 끝이 나는 꿈. 그러니까 시작도 못한 꿈. 이야기가 될 수 없는 꿈. 그런 꿈을 꾸다보면 하도 답답해서 어느 순간 이게 꿈이구나, 느껴지게 된다. 그렇다고 이건 꿈이니깐 지금 일어나버리자, 고 마음먹고 깨어날 수도 없다. 계속해서 옷을 찾아야 하고, 계속해서 슬로우 모션으로 도망가야 한다.

       그럴 때의 내 몸, 땅으로부터 1센티미터만큼 공중부양한 채 달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는 괴로운 내 몸을 아오이 마을에서처럼 토막내본다. 텍사스의 전기톱을 닮은 아오이가든의 녹이 슨 톱을 빌려 내 팔을, 내 다리를, 내 자궁을 쓰삭쓰삭 잘라본다. 어느새 나는 도망가야 하지만 도망가지 못하는 어정쩡한 모양새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조각난 팔 두 개, 다리 두 개, 몸 하나, 자궁 하나, 눈 알 두 개로 분리되어 있다. 누군가 나를, 아니 나라고 할 수 없게 보이는 내 부분들을 아오이 마을의 강에 내다버린다. 풍덩, 질퍽한 소리가 난다. 잠시 후 한 낚시꾼이 다리 하나를 낚았다. 형사는 내게 전화를 한다. 나는 개구리 비가 내리는 아오이 마을까지 운전해서 간다. 이게 당신 다린가요? 나는 내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고 그 테이블 위의 다리를 다시 올려다봐도 그게 내 다린지 아닌지조차 모르겠다. 그저 왼쪽 무릎이 간지러워 긁적긁적거릴 뿐. 제일 마지막에 발견된 내 눈 알을 입 속에 넣고 쪽쪽 빠는 상상도 해 본다. 입 안 가득 지린내가 진동할 거다. 나는 보지 않아도 좋을 많은 것을 봐왔으니. 나는 그걸 삼킬 수 있을까. 우걱우걱 씹어 넘길 수 있을까.

        이건 소설이니까, 이건 상상이니까 가능한 거다,고 생각한다. 아오이 마을따위는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해버리고 싶다. 그러니까 내 옷에 피가 하나도 묻지 않았고, 나는 이 끔찍한 이야기들을 아주 재미있게 읽어내려갔다고 말해버리고 싶다. 그런데 이 소설집을 읽고 나서 마음이 서늘해지는 건 아오이 마을이 단지 편혜영의 머릿속에서만 손 끝에서만, 내 꿈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아오이 마을이기 때문에. 나는 매일 그 강을, 그 저수지를, 그 맨홀 위를 지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언제고 또 다시 나만 슬로우 모션인 꿈을 꿀 것이기 때문에. 꼭 입어야 하는 옷이 없어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꿈을 꿀 것임을 알고 있기에. 꼼짝달싹 못하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 멀리서 개골개골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면 바로 그곳이 아오이 마을이다. 나는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내 몸 구석구석을 참 많이도 긁적거렸다. 눈알을 손가락 끝으로 돌리면 뽀드득 소리가 났다. 목욕탕에 가야겠다. 때도 밀어야겠다. 무더운 여름에 읽기 좋은 책이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