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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을 먹다 - 달과 지구, 그리고 당신의 그림자
    서재를쌓다 2008. 8. 8. 13:04
    달을 먹다
    김진규 지음/문학동네


       가을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뻔 했다, 라는 생각을 어젯밤에 문득 했다. 서늘해진 가을바람에 마음이 조금은 쓸쓸해지지 않았을까. 스무살에 읽었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 봤다. 스무살의 <깊은 슬픔>처럼 그렇게 울어버리지는 않았을까. 오늘이 반납마감일이다. 오랫동안 이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여러 이유가 있긴 했지만 단숨에 읽어 내려간 건 며칠사이다. 어제는 오늘 이 책을 반납할 생각으로 읽는내내 프린트해 책갈피 대용으로 썼던 그림을 새 종이에 다시 출력했다. 작가의 블로그에 올려져 있던 등장인물들간의 관계도. 이 그림을 보면 묘연이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의 어미인지 난이와 향이의 가여운 운명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누구의 표현대로 '조각보같은' 이 소설을 좀더 쉽게 끼어맞춰나갈 수 있다. 묘연의 첫번째 이야기, 라고 시작되면 관계도의 묘연을 한번 슬쩍 들여다봐주고 시작하면 된다. 이 소설을 읽어 나가는데 내게 도움이 되었듯이 이 책을 다음에 읽을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혹시라도 처음 책을 뒤적일 때 잡동사니라고 치부해 버리고 버리지만 않기를 바라면서 빳빳하게 프린트된 관계도를 보기 좋게 오려서 꽂아뒀다.

       워낙 진기한 (내게는 그랬다) 단어들이 많아 처음에는 그걸 내 단어장에 꼬박꼬박 적어뒀다. 요즘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 몇 페이지씩 단어들을 정리해 적어두고 심심할 때마다 읽으면 소설만큼이나 재미있다. 이런 식이다.

    오달지다                          달을 먹다 p.36
    [허술한 데가 없이] 야무지고 실속이 있다.
    최약국의 두루마기 옆선이 제 성정만큼이나 날카로웠다.
    뜨거운 인두가 한두 번 지난 길이 아니었다.
    하연의 오달진 노동의 흔적이었다.

       워낙 생소한 단어들이 많아 책 읽는 속도가 느렸다. 몇 페이지 안 가서 또 사전을 뒤적거리고 단어장에 정리해야 했으니깐. 오달지다, 밭다, 음전, 조갈, 갈급, 궤연, 벙글다, 동티, 자늑자늑, 되통스럽다, 등등. 그러다 안 되겠다 싶어 사전찾는 일을 그만 두었다. 귀찮은 일은 아니었다. 사전 찾는 일은 즐거웠다. 생소한 단어들을 입밖으로 소리내어 보면 달큰한 입내가 났다. 한번도 발음해 본 적 없는 것 같지만 익숙한 소리들이 이와 혀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걸 내가 아끼는 삼색볼펜으로 이렇게 저렇게 적어내는 일도 꽤 즐거웠다. 그런데 이러다가 소설 자체를 온전히 읽어내지 못할 것 같아서. 왠지 공부하듯이 책을 읽게 되는 것 같아서 이 책에서만큼은 그만뒀다. 모르는 단어들은 후에도 끊임없이 나왔지만 읽어 내는데는 무리가 없다. 그냥 이런 단어들을, 표현들을 사전 하나 보지 않고 줄줄이 쓰여 냈을 것만 같은 작가가 대단할 뿐. 역시 다독이 큰 재산인가 보다.

       읽으면서 느꼈던 몇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 책을 쓴 작가는 대단하다, 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으려고 처음 마음 먹었을 때는 지난 겨울즈음이었는데 한 편의 단편소설조차 써 보지 않았던 작가가 단번에 장편소설을 써 내고 그 소설이 문학동네소설상에 당선되었다는 사실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했다는 말. 당신에게 입력된 만큼 출력이 필요해, 그 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소설이라는 것 때문에. 이건 정말 소설같은 시작이다. 조금 더 넘쳤으면 좋았을 거라고, 결말이 너무 픽 갈대처럼 쓰러져 버린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흠. 나는 이 단정한 소설을 주로 단정치 못한 마음으로 읽었다. 그래서 늘 덮었다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는 흐트러진 자세였다. 잠시만 편안한 자세였다. 곧 허리가, 팔이, 다리가 아파올 자세. 그러다 몇 페이지 더 읽어가면 나도 모르게 자세가 꼿꼿해졌다. 맨 윗 단추에서 소매 맨 아래 단추까지 꼼꼼하게 끌어 잠구고는 단정하게 앉아 있는 소설 앞에서 나도 이내 자세를 바로 잡곤 했다.      

       어젯밤은, 아니 오늘 새벽에는 잠이 안 와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왜 달을 먹다, 인가를 설명한 작가의 글을 발견했다. "그래서 제목도 [달을 먹다]입니다. 월식을 응용한 것이지요. 월식이란 것이 지구의 그림자에 달이 가려지는 현상을 말하듯이, 누구나 자신의 그림자로 상대방을 가리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더워서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 나는 달의 그림자, 지구의 그림자를 생각했다. 당신의 그림자도. 여름이 너무 길다. 더위도. 당신도, 당신의 그림자도 이 더위 속에서 무사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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