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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르른 틈새 - 그녀는 소주를 잘 마시고,
    서재를쌓다 2008. 7. 25. 15:41
    푸르른 틈새
    권여선 지음/문학동네

     
        지난 가을 <분홍리본의 시절>을 읽었다. 아직도 나는 그 소설집을 생각하면 조건반사마냥 입 안의 침이 고인다. 수십마리의 생선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하얀 죽의 빛깔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아직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뽈찜이 무슨 맛일까 궁금하고, 김치볶음밥을 만들 때 김치의 반은 먼저, 반은 나중에 넣게 되었다. 그 뒤로 여기저기서 권여선의 단편을 만났다. 그러다 <소진의 기억>을 읽을 때에 나는 권여선,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자, 고 다이어리 한 귀퉁이에 적어놓았다. 그녀의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를 읽었다.

       이번 <문학동네> 여름호의 젊은작가특집에 권여선이 실렸다. 아직 자전소설은 읽지 못하고 '미인 작가 권여선을 말한다' 제목의 작가초상만 먼저 읽었다. 이런 식의 구절이 있었다. 그녀가 소주를 마시는 걸 보면 소주는 본래 저렇게 맛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 나질 않는데 아무튼 권여선 작가가 소주를 무척이나 맛나게 잘 마신다는 이야기였다. 

       작가 권여선의 본명은 권희선이다. 그녀는 소주를 잘 마시고, 욕설도 유쾌하게 하는 사람이다. <분홍리본의 시절>을 읽을 때 한강과 비슷하게 깡마르고 여린 느낌이었는데, 정반대인가보다. 

       그녀는 소주를 잘 마시고, 유쾌한 욕설을 하며, 넉넉한 사람이다. 

        왜 내가 그녀의 소설들을 읽으며 입맛을 다지고, 그날 저녁에는 그녀가 소설 속에서 말해주었던 음식들을 하나씩 만들어보았는지 의문이 풀렸다. 그녀는 소주를 잘 마시고, 유쾌한 욕설을 하며, 넉넉하고,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소주를 잘 마시고, 유쾌한 욕설을 하며, 넉넉하고, 요리를 좋아하며, 나이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 <푸르른 틈새>를 읽으며 여러번 울었다. 엉엉 울어버린 게 아니라, 마음이 저릿저릿 아파오며 한방울씩 떨어지는 눈물이었다. 여자의 아버지 이야기에서 많이 울었다. 젊은 시절, 망망대해를 헤치며 호탕한 뱃사람으로 기세등등했던 그가 나이가 들고 무릎이 꺽이여 술을 먹고 '이년들아! 나, 손재우 아직 안 죽었다!'를 연거푸 외치는 외로운 사내가 되었을 때. 그와 여자가 나란히 서서 각자의 라면을 끓이고, 나란히 앉아 각자 한 병씩의 소주를 비워낼 때. 그가 여자에게 용돈을 줄 때 하던 말들. 바다를 헤쳐나가던 그가 거리 위에서 죽었을 때. 그리고 이제 여자가 '이년들아! 이년들아! 나, 손미옥이, 아직 안 죽었다!' 외쳐댈 때.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 "아버지, 정말 천하일품이예요!" 그리고 여자가 사귀던 남자의 결혼상대를 알게 되었을 때.

        분명 십여년 전에 발표되었던 이 장편소설 후에 발표한, 그러니까 내가 이 장편소설 전에 읽었던 그녀의 단편소설들이 이 푸르른 장편소설보다 더 잘 쓴 작품이라는 건 알겠는데도 나는 이 긴 소설을 읽으면서 그 단편들보다 더 아껴주었다. 너는 참 좋은 책이야. 좋은 이야기야. 여러번 말해주었다. 꼼꼼하고 잘 쓰여진 단편소설들보다 그저 생각이 흐르는대로 쓰여진 것 같은 이 하얗고 긴 책에 더 마음이 갔다. <새의 선물>과 같은 시기에 문학상에 당선된 작품이라는데, 내가 <새의 선물>을 읽을 때 이 소설도 함께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지금보다 좀 더 젊은 나이일 때 읽어두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마지막으로. 인터넷에서 인터뷰 기사도 찾아 읽었다. 여기까지 보면 그녀는 소주를 잘 마시고, 유쾌한 욕설을 하며, 넉넉하고, 요리를 좋아하며, 나이 먹는 것을 좋아하고, 꿈을 이룬 사람이다. 앞으로 더 많은 소설을 읽어가면서 그녀를 더 잘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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