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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을 세우며 기도하옵니다
    모퉁이다방 2008. 6. 28. 00:18

    - 금요일 저녁. 열심히 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한 밤.

    - 어젯밤에 인터넷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물이 받고 싶어졌다. 똑똑. 문을 두드리면 배달왔습니다, 라며 누군가 내게 안겨주는 선물. 갑자기 뭔가 선물받고 싶어졌어, 라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으니 인터넷 서점에서 찜해두었던 책을 주문했다. 현장비평가가 선정한 올해의 좋은 소설들과 중국어 책. 이건 순전히 인터넷을 떠돌다가 발견하게 된 보물같은 블로그들에서 발견한 리스트. 장마가 시작할 때쯤엔 항상 이 책이 나온다고 했던 소설집과 이건 너무 시적이라며 공부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구절들을 옮겨놓은 중국어 책.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 인터넷 서점도 오전 10시 이전에 주문하면 당일 배송이다. 똑똑. 저녁, 선물이 도착했다. 아, 이건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니 더 기분 좋은 것. 아껴가며 읽을테다.

    - 도서관에 비치희망도서로 신청해뒀던 책이 도착했단다. 메일을 확인하니 공선옥 작가의 <행복한 만찬>이다. 아, 공선옥을 외치며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집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는지라 김밥을 사와 막내동생이랑 둘이서 저녁을 해결할 생각이였는데 전철역앞 사거리에 지나다가 통닭차가 등장한 것을 발견했다. 현금을 인출하고, 도서관에 들러 정수기 물을 벌꺽벌꺽 세 모금 들여마시고 <행복한 만찬>을 찾으러 4층 종합자료실에 갔다. 이 시간이 도서관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밤이 내려앉은 창가, 그리 많지 않은 이용자들, 한낮의 도서관은 사람이 주가 되지만, 밤의 도서관은 책이 주가 된다. 책들이 비로소 소리내어 숨쉬기 시작하는 고요하고 풍요로운 시간. <행복한 만찬>만 온지 알았더니 신청해놓은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과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도 함께 도착해있다. 이미 구립도서관에서 2권을 빌린터라 한권밖에 빌리지 못해 <행복한 만찬>만 대출할께요, 라며 입맛을 다졌더니 처음 보는 친철한 직원이 (공익일 수도 있다) 7월 4일까지 보관해두니 그 때까지 꼭 대출해가란다. 나는 요즘 친절한 사람에게 약하다. 최대한 높은 소리를 내어 고맙다고 했다.

    - 도서관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통닭차로 달려가 한 마리를 달라고 했다. 여기도 역시 친절한 사람이 있다. 찬바람이 선선하게 부는데 뜨거운 열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닭 한마리와 무와 머스터드 소스를 넣어준다. 고맙다고, 높은 소리 내어 인사하고 돌아왔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늦은 시간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젊은 청춘이고, 나는 늦은 시간에 기껏 기름기 가득한 통닭 먹을 생각에 땀 한방울 찔끔 나게 뛰는 나이 들어가는 청춘이다. 맥주 두 병을 샀다. 홈플러스에는 카스라이트가 한 병에 90원 할인한다. 180원 할인 받았다.

    - 9시 뉴스를 보며 통닭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요즘의 뉴스는 무언가를 먹으면서 보기에 적합하지 않다. 나는 여전히 키보드 뒤에 숨어 비겁하다. 100분 토론을 보면서 투덜대지만 광장에 나가지 않고 기름기 가득한 통닭 다리나 뜯고 있다. 맥주를 마시며 나는 비겁해, 비겁해, 그러고 있다. 술 마시며 지금 우리나라 너무 잘못되고 있잖아, 소리내서 외치지만 정작 상대방이 그래서, 집회에는 나갔어, 라고 하면. 2008년 6월, 나는 부끄러운 것 투성이다.

    - 훈련병이 된 사촌동생에게 인터넷 다음 카페를 통해서도 안부를 남길 수 있다는 걸 이제서야 알았다. 안 건 27일 오늘인데, 작성할 수 있는 기한은 26일 어제까지였다. 대신 사촌동생의 까까머리 인사가 담긴 동영상을 구경하고 숙모가 남긴 몇 통의 편지를 읽었다. 다정한 우리 숙모. 글로 읽는 숙모는 새롭다. 숙모의 안부글에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등장한다. 삼촌에게 연애편지를 쓰는 젊은 시절의 숙모가 등장하고, 우유병을 빨던 갓난애기 사촌동생이 등장한다. 소리도 없이 지나가버린 지난 시간들을 읽는 이 밤이 나는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군대에 갔다면 엄마는 어떤 편지를 내게 보내줬을까. 엄마는 언젠가 내 생일날, 내 키에 반이 되는 아이보리빛 한지에 매직으로 꾹꾹 눌러 생일 발원문이란 글을 옮겨 내게 건넸다.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은 이 부분이다. 

       생일을 맞아 특별히 원을 세우며 기도하옵니다. 자비하신 부처님이시여!
       심신이 금강과 같이 견고하고 수명은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며 지혜는 일월같이 빛나옵고 복덕은 바다와 같아지이다.

    - 오늘 밤, 나는 원을 세우며 기도하는 엄마를, 나를, 우리들을 생각할지이다. 이 나라가, 우리들이, 나와 당신이 금강과 같이 견고하여지고 지혜가 일월같이 빛나고 복덕은 바다와 같이 깊고 푸르러지기를. 푸르러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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