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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면증
    모퉁이다방 2008. 6. 26. 19:10
       불면증이 시작됐다. 더워서 잠이 오지 않던 지난 여름의 괴로웠던 밤들이 떠올라 끔찍했다. 우리집은 확실히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 계절을 충실히 따르는 집이다. 어제는 또 잠이 안 올까 두려워 8시쯤에 동생이랑 중랑천엘 갔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밤운동을 하고 있는지 미처 몰랐다. 그렇게 강가의 저녁바람이 시원한지도 몰랐다. 가지고 갔던 엠피쓰리를 내려놓고 뛰고 걸으면서 물 흘러가는 소리, 바람 넘실대는 소리,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다 떠는 소리를 들었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비스듬히 누워 시청률 한자리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보고, 무릎팍도사를 봤다. 김주하 언니의 마감뉴스까지 챙겨보니 저절로 잠이 달아나버렸다. 다시 물대포다. 며칠 전엔 길치에다 바보같은 나는 늘 가던 약수터 위였는데도 빙 둘러서 땡볕에 한 시간 넘게 걸어 중랑구립도서관에서 김연수의 <스무살>과 <7번국도>를 빌렸다. 김연수의 책은 죄다 사두고 싶은데 세 권이 절판이다. <스무살>을 아껴가며 읽다 너무 행복해져 이 파스텔톤 예쁜 표지의 책을 그냥 영영 반납하지 말아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면 집 앞 도서관에서까지 책을 빌리지 못하니 그럴 순 없다. 헌책방을 뒤져야겠다. 지금은 <7번국도>를 읽고 있다. 자정을 넘겨 <7번국도>를 펼쳤다. 7번 국도를 따라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기는데 시위 중 손가락이 절단났다는 남자가 떠올랐다. 아, 나는 6월 내내 얼마나 미안한지 모른다.  

       그러고 잠깐 인터넷을 한다는게 길어져 버렸다. 미뤄뒀던 메일을 오늘 밤 꼭 다 쓰고 싶었다. 함께 보낼 음악파일들을 찾아내고 그에게, 그녀에게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자판을 두드려 전송을 완료했다. 새벽은 더욱 깊어졌고 잠은 저 멀리 달아나버렸다. 그래서 미역국을 끓였다.

       중랑천에서 신나게 걸으면서 동생과 나는 흰살 생선이 들어간 미역국이 너무너무너무 먹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검색을 했는데, 어떤 생선을 써야하는지도 모르겠고, 처음 만들어보는 나는 분명 그 미역국을 비리게 만들어 모두 버리게 만들게 분명했다. 아무튼 집에는 특별한 재료가 없으므로 그냥 미역국을 끓였다. 양반 미역을 꺼내 물에 불리고, 마늘을 다졌다. 멸치의 머리와 내장을 떼어내고 멸치국물을 냈다. 불려진 미역을 잘게 자르고 다진 마늘과 약간의 간장과 소금을 넣어 조물조물 양념해뒀다. 냄비에 참기름 한 숟가락을 넣고 양념해놓은 미역을 자글자글 볶았다. 맛있는 냄새가 훅 솟아올라왔다. 거기에 멸치국물을 붓고 소금을 조금 더 넣었다. 먹고 남겨놓은 닭도리탕 국물이 있어 쌀뜨물을 좀 붓고 감자 껍질을 벗겨 먹음직한 크기로 썰어넣고 자글자글 조렸다. 쌀을 씻어 밥도 새로 했다. 밥솥에서 밥 냄새가 기분 좋게 올라왔다.

       그렇게 조린 감자의 불을 끄고, 알맞게 간이 된 미역국 불을 끄고, 다 된 쌀밥을 주걱으로 한번 휘젓어주고, 얼음을 잔뜩 넣은 물 한잔을 벌꺽벌꺽 들여마시고 비로소 잠이 들었다. 펼쳐놓은 <7번국도>를 덮고, 켜뒀던 스탠드불을 껐다. 창밖에는 아침이 몰려오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귀신같이 냄비를 열어 집에 뭔가 먹을 것이 있다는 걸 본능으로 알아차리는 우리집 돼지와, 하루종일 미역국만 먹어도 살 수 있다며 매일을 자기 생일이라 착각하는 게 분명한 우리집 소가 밥이며, 감자며, 미역국을 열심히 해치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니 잠이 마구마구 몰려왔다.

       물론 우리 세 자매는 그 새벽의 요리를 아침에 일어나 맛있게 냠냠 잘 먹어치웠다. 그리고 내가 아침의 미역국을 먹으면서 알아차린 한가지. 며칠 전에 끓인 미역국은 너무 맛이 없어 꾸역꾸역 억지로 먹어치웠는데 나는 그게 참기름이 떨어져서 넣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탓도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요인은 미역에 양념을 먼저 하지 않아서 인 것 같다. 언젠가 급하게 만드느라 닭도리탕의 생닭에 양념도 배어놓지 않고 끓는 물에 생닭을 먼저 투하해놓고 양념장을 풀었는데 확실히 오래 조려도 닭살 깊이 양념이 배지 않았다. 역시 재료에 먼저 양념을 배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람의 경우에도 짭잘하게 양념을 하고 세상에 투하되어야 맛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 양념하지 않은 인간은 세상이라는 탕국 속에서 겉만 짭조름하고 속은 밋밋한 채 뼈만 발려지는 그 날까지 맛 없을 수 밖에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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