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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대와 책 - 정혜윤 언니가 생각해 낸 수십권의 책
    서재를쌓다 2008. 5. 22. 17:31
    침대와 책
    정혜윤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구식이라 그런지 모니터 상으로 긴 글을 잘 읽어내질 못하겠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긴 글은 출력해서 읽는 경우가 많다. 마우스로 쭉쭉 내리며 보고 나서 다음 페이지를 클릭하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글은 왠지 글이 아닌 것만 같다. 하얀 종이 위에 새겨진 까만 글자들을 매끈한 종이의 감촉을 느끼며 침을 묻히며 넘겨 읽어야만 진정 글을 읽는 것만 같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매일 들르는 채널예스에서 자주 업데이트 되는 정혜윤PD의 칼럼에서 제일 정확히, 자주 읽었던 건 마지막의 소개글이었다. 

       그리고 이 몽롱한 그림같은 표지사진 가운데 하얗게 삐뚤빼뚤 새겨진 침대와 책. 그러니까 불면 날라가버릴 인터넷 칼럼이 아닌, 힘이 센 내가 아무리 헥헥대며 불어도 날라갈리 없는 진짜 책, 진짜 종이, 진짜 활자로 이루어진 <침대와 책>을 읽었다. 정혜윤처럼 안락하고 넓은 새하얀 시트의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주말에 뚝딱 읽어버렸다고 하면 근사할 테지만, 일단 우리집엔 침대가 없다. 여자 셋이 사는 자취집이 그리 넓을리도 없고, 새하얀 시트같은 건 애시당초 없었다. 그래서 갓 이사왔을 때는 반짝반짝 광이 났으나 이제는 걸레로 팍팍 문질러도 얼룩들이 없어지지 않는 오래된 오렌지빛 장판 위에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언젠가 내게도 책으로 둘러쌓인 새하얀 시트를 덮은 넓고 안락한 침대가 생길거라 기대하면서.

       첫 번째 이야기. 꽃 같은 그대가 울고 있을 때. 이 글을 읽을 때, 나는 이 책이 좋았다. 후배가 '언니언니언니언니언니' 라고 다섯 번이나 연달아 부르는 문자메시지를 보냈기에 한밤 중에 전화를 했더니 후배가 울면서 언니는 내가 새벽 세 시에 우는 것 알고 있었어, 라고 묻는 첫 번째 문장에서. 내게도 그런 후배가 있었다. 그 아이는 꼭 메일을 보내면서 내 이름을 두 번씩 연달아 불렀다. 언니언니. 언니는 꼭 이렇게 두 번씩 불러줘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모르면서도 니가 그렇게 불러주니까 좋다, 면서 그 아이의 이름을 세 번 연달아 부르며 답멜을 보냈다. 그 아이도 새벽 세 시에 울고 있었을까?

       이렇게 꼭 다섯번 연달아 불러야 하는 정혜윤 언니의 방대하고 광대한 독서기가 이 책에 담겨있다. 한 꼭지에 무려 스무권의 책이 등장하기도 한다. 와. 정말 이런 사람이 있단 말이야? 어떻게 이렇게 많은 책을 읽을 수가 있어? 그것도 편식하지 않고. 그녀가 읽은 책들 가운데, 읽지 않은 책이 더 많았던 나는 나란 인간은 도대체 그 동안 뭘 한걸까?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 내용이 이 책이고 저 내용이 저 책이란 거지? 뒤죽박죽 복잡해지기도 했다. 하나의 책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또 다른 책으로 이어져 또 다른 책으로 끝나는 식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 오늘 나는 마음의 평화를 잃었는데, 마음의 평화를 잃고 나니 폴 오스터의 <신탁의 밤>의 포르투갈제 파란색 노트가 생각났다. 오늘 베트남 여성이 전과 6범의 남편에게 구타당해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그 뉴스를 읽는 순간 쉼보르스카의 <베트남>이란 시가 생각났다. 그해 여름 강화도 여행 길에 비가 내렸는데, 그 비를 보는 순간 <백년의 고독>의 이 구절이 생각났다. 세상에 얼마나 많이 독서를 해야 마음의 평화를 잃은 날, 베트남 여성이 남편에게 구타당해 죽었다는 뉴스를 볼 때, 여행길의 비를 보며 저런 책의 저런 구절들을 금방 생각해 낼 수 있단 말인가. 내 말은.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중간중간 나오는 '...을 생각해냈다' 라는 구절이 나오면 띠옹해지는 거다. 와, 이 언니, 정말 무시무시한 사람이구나. 그리고 의심도 해 보는 거지. 정말 그 순간 바로 생각이 난 게 맞는 걸까? 정말 집에 와서 책도 뒤적거리지도 않고 바로 생각 난거야? 어려운 작가 이름이랑 제목들도 다 바로 생각나는 거야? 기억력이라곤 지독하게 없는 나는 정말 의심스러웠다.
     
       결론은 정혜윤 언니가 부러웠다는 얘기다. 어릴 때부터 많은 책을 읽어온 언니가. 그래서 어떤 순간이든 책의 한 구절을 떠올릴 수 있는 언니가. 책을 사방에 쌓아놓고 뒹굴수 있는 침대를 가진 언니가. 그래서 인기 절정의 칼럼을 마치고 이렇게 근사한 표지의 책을 낼 수 있었던 언니가. 새벽 세 시마다 울고 있었던, 엔딩의 사를 근사하게 써 준, 언니를 다섯 번 부르는 트뤼포 걸 후배가 있는 언니가.

       그리고 이 촉촉하고 복잡했던 책 속에서 내가 얻은 건 당장 읽어야 할 책 목록. 무진장 많지만, 그 중에서 무엇보다 <검은책>과 <사랑의 역사>, <그리스 인 조르바>와 <신탁의 밤>은 이 여름이 가기 전에 꼭 읽을테다. 얍! 끝으로 너무 부러워 다섯 번은 읽은 정혜윤 언니의 침대를 묘사한 부분.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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