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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할 권리 - 참 다행이다, 당신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서재를쌓다 2008. 5. 17. 21:59
    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꿈에 김연수 작가가 나왔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중요한 건 '내' 꿈에 김연수 작가가 나왔다는 거다. 꿈이 미래를 예언해주는 건 아닐까 간절히 바라면서 깨어나던 아침들이 있었다. 그 때 나는 꿈을 부여잡고 놓칠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예언처럼 깨달았다. 그 집착이 참 부질없다는 것을. 그러니 이제 꿈을 꾸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뒤적거리는 날들은 없다. 누군가 내 꿈에 나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는 거다. 무언가 켜 둔 채로 잠에 들었거나, 그 사람을 많이 생각했거나. 이번의 경우는 후자다.

       김연수 작가의 블로그에서 곧 여행에 관한 산문집이 나온다는 글을 보고 그 뒤로 매일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서 '여행할 권리'를 검색했다. 알라딘에서는 모린 오코너의 <평등할 권리>만 검색되어 나왔고, 예스24에는 아무 것도 검색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어둑어둑한 푸른 길 위에 '김연수 산문집'이라고 노오랗게 새겨진 '여행할 권리'가 검색됐다. 아,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 것이 이렇게 신나는 거구나. 그의 신간을 기다리는 독자의 마음이란 이렇게 설레는 거구나. 나는 누군가의 부지런한 독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혼자 감격했다.
     
       그리고 열심히 읽었다. 어떤 구절에서는 깔깔거리며, 어떤 페이지는 아껴가며, 어떤 문장들은 두 번씩 반복해가며 읽었다. 책에는 직업이 작가인 '인텔리'하고 '총밍'한 김연수가 1999년부터 밟은 땅들, 그 땅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노오랗고 커다란 점과 함께 담겨져 있다. 곳곳에 그가 찍었을 게 분명할 자그마한 사진들과 함께. 이런 사람들이다. 옌뼨에서 만난 깐두부만 먹는 이춘대씨, 아버지의 고향에서 만난 도야마씨, 밤베르크에서 만난 쎄자르, 독일의 진실된 청년 푸르미, 네가 살고 싶다면 너는 살 수 있는 거라고 말해주었던 버클리의 후사꼬 할머니.

       중간쯤 읽다가 나는 김연수 작가가 블로그에 남긴 글을 생각해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또박또박 읽으려고 대충 훑어봤던 이 책에 관한 글. 이 곳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 그러니까 이 책에 등장하는 직업이 작가인 김연수가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본 구절과 이 책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라 밝혀놓은 글. 그걸 또박또박 읽으러 들어갔는데 '잠시 쉬다가 올게요' 라며 웃는 이모니콘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아, 허탈하여라. 이럴거면 진작에 읽어둘걸. 대신 그가 잠시 쉬다가 오겠다며 웃으며 함께 남겨놓은 음악을 재생시켜 들었다. 코타로 오시로의 '벚꽃 필 무렵'.

       가느다란 통기타 소리는 듣는 즉시 벚꽃길을 떠올리게 하지는 않았지만,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이었다. 그 길로 코타로 오시로의 음악을 모두 찾아 남은 책을 읽는 동안 들었다. 일본의 기타리스트가 들려주는 통기타 선율 위에 신화와 동방신기를 사랑한다던 애나와 려화, 마음 심을 믿는 중국 옌지의 신국판씨와 멸치, 자신의 한글 이름을 땅 위에 새겨보던 중국 후쟈좡 마을의 호세영 할아버지, 그리고 버클리, 서울, 일본 땅 위의 지나왔고, 진행되고 있는 어떤 이야기들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아, 나는 이 책이 참 좋다. 첫 이야기를 읽을 때부터 이 책이 좋았다. 이 책을 쓴 직업이 작가인 김연수가 좋았고, 그가 첫 번째로 만난 이춘대씨도 좋았다. 그 뒤로 그가 만난 사람들도 모두 좋았다. 길로 시작하고 길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가. 국경 안에 있고, 국경 밖에 있지만 그래서 다르지만 틀리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았다. 그가 들려주는 국경의 이야기가 좋았다.

       책을 덮어놓고는 포털창에 '김연수 작가'를 쳤다. 내가 읽었던 기사, 읽지 않았던 기사들을 찾아 다시 읽고, 새로 읽었다. 그 곳에는 작년 연말 문인들을 초청해놓고 강정 시인과 '수와 정'이라는 팀을 결성해서 몸을 숙이고 기타를 치는 김연수가 있었고, 여자 중에서 내 딸이 제일 좋다며 딸을 안아줄 때 꽉 안아준다며 포즈를 취하는 김연수가 있었다.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을 읽곤 더 그가 좋아졌다. 직업이 작가인 김연수가. 그가 떠난 그 길도. 그가 만난 평범하고 특별한 사람들도. 그러니 그 날 꿈에 김연수 작가가 나온 건 당연한 일이다.

       요즘 적당히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아지는, 친한 사람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자꾸 그런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이 있는데, 너무 좋아. 오늘 읽은 부분 중에 정말 좋은 부분이 있는데 꼭 너한테 읽어주고 싶어. 그러면 친구의 경우는 좋아하고, 동생의 경우는 집어치우라고 하든지 지금 당장, 빠른 속도로 읽으라고 한다. <여행할 권리>를 받고 읽기 시작한 날, 동생에게 이 구절을 읽어줬다. 아주 빠른 속도로.

       "물론 택시는 오지 않았다. 대신에 검푸른 국경의 저녁하늘이 별들을 잔뜩 태우고 찾아왔다. 거기에 우리가 탈 자리는 없었다. 나는 자리가 비좁다며 소란을 피우는 별들을 올려다보며 이춘대씨에게 중국으로 들어가게 되면 사천식 샤브샤브 훠궈와 꼬치요리인 추알을 꼭 사먹자고 했다." (p.29)

       이 부분. 빠르게 읽었지만 언니가 읽는 건 늘 지루하게 생각하는 동생은 심드렁하게 어, 그래, 라고 말하곤 말았지만 나는 이 구절을 다시 떠올리곤 기분이 더 좋아졌다. 검색해서 본 어떤 글의 문구처럼 참 다행이다. 당신이 소설가가 되어줘서. 그리고 참 다행이다. 내가 당신 글을 읽을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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