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버킷 리스트 - 아빠 생각
    극장에가다 2008. 4. 29. 11:43


        아빠가 수목장 이야기를 하시는 걸 들었다. 작은 아버지는 그런 아빠에게 화를 내시고. 스치듯 그 얘길 들었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모두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죽음이건만 내 죽음보다 상상하기 힘든 건 내 부모의, 내 가족의, 내 친구들의 죽음이다. 내 죽음에 관한 생각의 끝은 언제나 덤덤한데, 그들의 죽음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저리다. 작은 아버지는 다같이 누울 땅이 이렇게 있는데 왜 자꾸 형님은 수목장 이야기를 하시느냐고 언성을 높이셨다. 그러니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나는 아빠가 수목장을 생각했다는 것보다 죽음에 대해 이리도 자세히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에 마음이 쓸쓸해졌다. 내가 내 죽음을 생각하듯 아빠가 아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할텐데, 내 아비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금세 목이 메인다. 못난 자식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버킷리스트>를 보고 저렇게 유쾌하고 따뜻한 죽음을 내 아비가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건 영화고,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히히낙락할 자 어디 있으며, 그렇게 부자에 나를 위해 펑펑 돈을 써 줄 병실 친구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희박하며, 히말라야 정상까지 목숨 걸고 올라가서 내 뼈를 묻어줄 비서가 어디 있겠는가. 그 나이에 스카이 다이빙하면서 심장마비 걸리지 않는 것도 말이 안되고. 나는 이 나이에 번지점프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오줌이 찔끔 새어나올 것 같은데. (내려가는 놀이기구들은 질색이다. 돈 내고 그 토나오는 걸 굳이 탈 필요는 없다는 성인이 되어서 비로소 깨달은 게지.) 그래도 내 주위의 누군가가 정말 영화같은 로또와 같은 행운을 맞아 저렇게 행복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나는 눈물 딱 한 방울만 흘리며 따스하게 그를 보낼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죽음이 부러웠다. 그 모든 것을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누렸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년에 경험하는 피라미드 정상에서의 일몰은 더욱 아름다웠을테지. 대놓고 뻔하긴 했지만. 뭐. 요즘은 복잡한 일들은 뉴스에서 워낙 많이 보니깐 영화는 이런 뻔한 플롯에 따스한 영화들이 오히려 더 좋다. 어쨌든 해피엔딩은 찾아오게 마련이니까. 잭 니콜슨과 모간 프리먼의 연기를 본 것만으로도 만족스럽고.


        나는 아빠가 집만 그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라면서 아빠가 글과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더 자라서는 흙과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인 걸 알게 됐다. 언제부턴가 아빠는 집 근처 조그만 밭을 가꾸기 시작하셨는데 밭에 가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있다 오셨다. 가서 뭘 하시나 보면 잡초를 뽑고, 나무를 심고, 토끼를 기르고 (토끼는 결국 도망가 버렸지만), 물을 주고. 그리곤 가만히 의자에 앉아 계시는 거다. 가끔 나도 밭에 가서 배드민턴을 치고, 고기를 구워 먹고, 아빠 곁에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바람 소리, 새 소리, 나무 소리, 귀뚜라미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어느 날은 아빠가 이건 다른 사람한테는 한번도 안 했던 이야기라며 우리 큰딸한테만 하고 말거라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이야기도 슬펐고 내가 나이 들고, 아빠가 늙어 이런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다는 사실도 슬퍼서 어둠 속에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 순간, 정말 반딧불이가 나타났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 곁에 앉은 아빠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고 노랗고 환한 작은 불빛들이 바람을 타고 춤추고 있는 거다. 아, 너무 꿈만 같아서 또 눈물이 나왔다. 정말 영화같았다. 아빠와 나, 어두운 배경에 쏟아져 나오는 옛날 이야기, 그리고 반딧불이.

       작은 아버지와 아빠 이야기를 훔쳐 듣곤 결국 그리 안 될 걸 알지만 나는 아빠가 담긴 커다란 나무를 상상해봤다. 두 눈을 잔뜩 찌푸리고 올려다봐야할 정도로 커다란 나무. 봄이면 새싹이 가득할 나무. 여름이면 초록이 무성할 나무. 가을이면 열매가 탐스러울 나무. 겨울이면 앙상할 나무. 그리고 다시 봄. 커다란 기둥을 두 팔 가득 품에 안으면 얼마나 따스할까, 커다란 그늘에 누워 있으면 얼마나 시원할까, 하는 생각. 아무래도 유전인가. 아빠가 그리 흙이며 나무며 꽃을 좋아하는 걸 봐와선가. 나이가 들수록 나도 나무가 좋다. 풀도 좋고, 꽃도 좋다. 흙도 좋고. 아빠가 좋은 건 말하면 입 안 아프고. 이상하다. <버킷 리스트>를 보면서 아빠 생각 전혀 안 났는데, 영화 본 걸 쓰려니깐 영화 생각은 안 나고 자꾸 아빠 생각만 나네. 그래서 영화 얘긴 손톱만큼이고 죄다 아빠 얘기뿐이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