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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이블루베리나이츠 -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는 법
    극장에가다 2008. 3. 10. 20:59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라서 드문드문 지워진 그 해 여름. 그 해의 기억이 언젠가 차츰 지워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래. 세월이 약이라고 어떤 기억은 오래 남아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어떤 기억은 잊혀져서 나를 절망에서 구해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 해 여름, 내리는 비만큼 많은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들었던 그 때. <마이블루베리나이츠>는 그 시절의 나를 보여주고 있었다.

       모든 진행 중인 이별을 말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과해야 하는 법이다. 흘리는 눈물도, 마시는 술도, 다시 시작하자고 입 안 가득 맴도는 말도, 흐르는 음악조차도. 그 해 여름을 아주 오래 전 지나온 나는 <마이블루베리54나이츠>를 중반쯤 보고선 지겹다고 생각했다. 늘 똑같은 사랑, 늘 똑같은 이별, 늘 똑같은 아픔. 왜 나는 그 때 쿨하지 못했나. 변해버린 너따위는 필요없다며 깨끗하게 마음을 정리해버리지 못했나.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늘 후회 뿐이다. 그 사람과 더 오래 지내지 못한 후회, 그 사람을 깨끗하게 떠나보내지 못한 후회. 지금에야 다시 그 때가 찾아 온다면 나는 어른답게 사랑하고, 어른답게 헤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다시 그 상황이 닥치면 나는 또 아이처럼 사랑하고, 아이처럼 헤어질 것을 안다.


       영화 밖에서는 가수인 노라 존스는 한번도 영화 안에서 노래하지 않는다. 그녀가 캐스팅 된 이유가 영화 안에서 기똥차게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기 위한 것일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그냥 실연의 상처에 맞닥뜨린 블루베리파이를 좋아하는 여자일 뿐이다. 그녀는 남자의 단골집에 찾아가 열쇠를 맡기고, 남자를 잊지 못해 매일 밤 그 곳을 찾아간다. 그 단골집엔 섹시하고 다정다감한 주인 주드로, 제레미가 있고. 어느날 그녀는 열쇠를 돌려달라고 하고 길을 떠난다. 그를 잊기 위해서, 나를 찾기 위해서. 그 길의 한 가운데에서 알콜중독에 빠져 이혼한 아내를 잊지 못하는 어니에게 술을 만들어 주고, 남편이 죽어버린 수 린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버지를 잃은 레슬리의 차를 운전해준다. 그리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노라 존스, 그러니까 엘리자베스는 말한다. 때론 타인을 통해서 나를 또렷하게 볼 수 있다고. 그리고 더 나은 내가 되어간다고. 그녀가 길을 떠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실연의 상처로 허덕이는 엘리자베스로 남아있었겠지만 길을 떠났고 1년이 지났고 건너편에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는 그 거리로 돌아왔다. 제레미는 엘리자베스에게 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변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그녀의 사랑은 시작되고.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나탈리 포트만이다. 노라 존스는 착한 연기를 그럭저럭 잘 해내주었고, 주드 로는 의외로 비중이 적은 역할이였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그저그런 카페의 주인 역할. 레이첼 웨이즈가 맡은 역할은 이전의 그녀에 비해 너무 강해서 뭔가 좀 어색했다. 나탈리 포트만이 노라 존스와 아빠 이야기를 나누며 창 밖을 내다보면서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연기는 정말 좋았다. 뭔가 꾹꾹 눌러삼키고 있는, 그렇지만 앞자리의 상대에게 강해보이고 싶은, 하지만 실제 속내를 내보일 수 밖에 없는, 강하지만 여린 사람의 표정. 나탈리 포트만은 정말 날이 갈수록 빛이 난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노라 존스의 주제곡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그저 감미롭고 달콤한 로맨틱한 이야기라 생각하고 극장으로 향한다면 후회할 수도 있다. 이건 왕가위 영화이기 때문에. 딱 왕가위스럽다. <중경삼림>에서처럼 수첩에 적어두고 싶은 대사들이 나오고, 각기 사연을 가진 열쇠를 보관하는 유리병이나 들어가고 싶었지만 들어갈 수 없었던 문, 늘 팔리지 않지만 혹시나 팔리지 몰라 늘 만드는 블루베리 파이에 대한 감상적인 영상들이 즐비해있는. 영화가 끝나고 나니깐 정말 촉촉한 블루베리파이에 커피 한 잔이 간절해졌다. 그걸 먹으면 왠지 잠시나마 행복해질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딱 왕가위스러운, 잘 나가는 배우들이 떼거지로 등장하는, 우리들의 이별의 한 순간을 포착한 영화다. 이별이 아직 먼 사람은 그저 따분할 지도 모르고, 이별이 진행 중인 사람은 가슴이 따끔따끔할 지도 모르고, 이별을 멀리 지나온 사람은 그들의 이별이 그저 가엾게만 느껴질 지도 모른다. 모든 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렇게 당장 죽을 것처럼 슬퍼하지 말아요, 라고. 어쨌든 영화를 끝까지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엘리자베스는 변했으니까, 단단해졌으니까. 그렇게 젖은 땅은 굳어가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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