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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를 기울이면 - 그들이 맞이한 청춘의 새벽
    극장에가다 2008. 3. 3. 12:42

      이 길을 쭉 가면 그 마을로 이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혼자인걸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자고 꿈을 꾸었어
      쓸쓸함을 억누르고 강한 자신을 지켜나가자
      걷다 지쳐 잠시 멈추면 떠오르는 고향길
      언덕을 감는 비탈길 그런 나를 꾸짖고 있어
      컨트리 로드


       친구에게서 이런 문자가 왔다. '<허니와 클로버>를 보고 스무살의 우리 생각이 났어. 청춘을 함께 보낸 우리 셋이 만나서 낮술하자.' 우린 조금 멀리 있어서, 낮술은 아직 하진 못했고 대신 나는 <허니와 클로버>를 다시 꺼내 봤다. 청춘. 영화를 다시 보면서 정말 우리도 저들같이 푸르른 봄의 시절을 보낸걸까, 생각했다. 영화 후반부에 다케모토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 함께 차로 갔던 바닷가를 혼자 낑낑대며 자전거로 달려간다. 오르막을 여러번 지나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밤거리를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달린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죽을 힘을 다해 밤새 달려 바닷가에 도착한다. 그 힘든 밤이 지나고 그가 마주한 새벽을 함께 맞으면서 나는 왜 그가 그렇게 달려갔는지 알 수 있었다. 땀을 왕창 흘린 뒤에 다케모토가 맞이한 아침. <허니와 클로버>를 보면서 청춘이란 여자도 반해버릴 아오이 유우의 싱그러움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천부적인 재능이 아니라, 바로 다케모토가 맞이하는 새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 그런 새벽을 맞이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그의 밤을 질투했다.

       <귀를 기울이면>을 보고 다케모토의 새벽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청춘을 함께 보낸 다른 친구는 비가 오는 좌석버스 안에서 이 영화 이야기를 해줬었다. '이 영화에 열 여섯인데 벌써 진로를 결정한 남자친구에게 자극을 받아서 며칠 밤을 새우면서 소설을 써보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친구는 다케모토의 새벽과 같은 시즈크의 아침을 이야기했다. '주인공이 죽을 힘을 다해서 소설을 다 끝내고 잠을 자는데, 정말 죽을듯이 깊이 잠을 자는 장면이 나와.' 우리는 비가 내리는 창밖을 좌석버스에 나란히 바라보면서 시즈크의 밤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시즈크가 맞이할 아침을 질투했다.

       시즈크는 열 여섯의 아기자기한 고민들을 이어나간다. 진로를 어떻게, 언제쯤 결정해야 좋을지 모를 막막함을 걱정하고, 단짝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함께 걱정하고,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아이에게서 좋아한다는 고백에 혼란스러워하고, 방학동안 목표한 책을 읽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지키려 애쓰고, 부탁받은 '컨트리 로드'의 개사를 고민하고, 남자친구의 재능과 미래에 대한 확고한 결심을 질투한다. 자신도 그와 같이 지금 바라는 무언가를 있는 힘껏 노력해보는 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보낸 시즈크의 낮과 밤들, 마침내 맞이한 새벽. 우리는 안다. 시즈크의 결과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는 걸. 그 과정만으로도 결과는 반짝반짝 빛난다는 것을. 그래서 시즈크의 첫번째 소설을 다 읽은 할아버지의 '멋지다'는 표현에 백 번 동감했고, 그 말을 듣고 울음을 터뜨려버리는 시즈크를 보고 울어버렸다. 그리고 먹은 우동의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힐지 상상하며 입맛을 다졌다.

       아직도 시즈크가 열 여섯에 하는 고민들을 그대로 이어나가고 있는 나는 시즈크가 이제 맞이하게 될 봄의 빛깔이 부러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이어나갈 여름의 열기가 지나고 나면 다가올 가을의 열매도. 시즈크는 아빠에게 도서 카드에서 바코드로 넘어가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툴툴거린다. 도서카드가 훨씬 좋다고. 펜으로 꾹꾹 대출자의 이름을 눌러쓰고, 내 앞에 어떤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이 책에 손때를 묻혔는지 알 수 있는 도서 카드. 바코드 쪽이 훨씬 더 편리하지만 모두들 도서 카드였던 때를 잊지 못하는 이유. 그러고보니 시즈크도, 청춘도, 모두 도서카드를 닮았다. 도서 카드에서 바코드로 넘어가듯 시즈크도 청춘을 그렇게 넘어올테지. 그 많은 도서 카드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냥 버려져 소각되어 졌을까. 그 많은 푸르른 봄을 담은 기억들이.

       봄이 만연해오면 문자를 보내 오래간만에 셋이 모여 낮술을 해야겠다. 현실에 가려 내 여렸던 청춘의 기억들을 자꾸만 잊어버리게 된다. 얼마나 풋풋했는지. 얼마나 푸르렀는지. 아, 요건 또렷하다. 얼마나 무모했는지. 뭐. 아직도 청춘이지만 지금보다 더 어렸던 청춘, 그 날의 우리들을 추억하기 위해서 마셔줘야지. 뚱땡이 고양이가 '문'으로 불리든 '돼지'로 불리든 뚱땡이 고양이인 것처럼, 우리가 공유한 청춘도 누구에게 어떤 이름으로 추억되든 청춘 그 자체로 남아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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