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다시 시작될 수 있어. 서재에서 순수한 열정으로 사랑을 나눴던 그 남자로 돌아가서, 너를 찾고, 너를 사랑하고, 너와 결혼하고, 치욕없이 살거야.    


   극장 안에서 유일하게 위로받았던 때도 있었는데,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극장을 안 가도 너무 안 갔다. 그 곳까지 가는 걸음이 천근같이 느껴졌다. 그래도 가서 보면 더할나위없이 좋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제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면서 <주노>, <어톤먼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꼭 극장에서 보리라, 결심했다. 오늘 <어톤먼트>를 봤다. 나는 너무 좋아서 엉덩이를 들썩거렸고, 너무 좋아서 여러번 울었다. 아, 영화란 이런 존재였지.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이 이렇게 가슴 설레는 일이였지. 나는 이제 극장까지 날아서도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사실 <어톤먼트>를 보면서 내내 원작, 이언 맥큐언의 <속죄>를 생각했다. 영화도 이렇게 좋은데, 원작은 또 얼마나 대단할까. <암스테르담>을 읽고 이언 맥큐언에 첫눈에 반해버렸으니까. 도서관에 잔뜩 신청해놓은 이언 맥큐언의 책들은 아직도 처리중이다. 신년이라 여러 선정 과정이 있어 3월에야 신청한 책이 도착한다는데, 더는 기다릴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당장 일어나서 서점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어톤먼트>는 수십장의 잘 그려진 풍경화같다. 하나, 연꽃이 둥둥 떠있는 고풍스런 분수대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속옷을 흠뻑 젖은 채 분수대 위에 올라가 있고 남자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여자와 남자의 눈빛만 봐도 우리는 두 사람이 사랑하는 마음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먼 곳의 시선 하나. 또 하나, 늦은 밤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문 앞에 서 있다. 옆에는 가족들이 있다. 남자가 그들을 향해 온다. 여자의 표정에서 우리는 이제 비극이 시작되리라는 걸 알 수 있다. 또 하나, 여자와 남자가 바닷가에 있다. 웃고 있다. 아주 행복해보인다. 지금 죽어도 좋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너무나 행복한 꿈이라는 걸 알아버린다.
   
   나는 타자기 소리나 키보드의 타닥타닥 소리에 약하다. 그 소리만 들으면 아득해져 버린다. 조니 뎁의 이름값이 아까웠던 영화 <시크릿 윈도우>조차 내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순전히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에, 작가인 주인공 때문에. 어떤 영화든 이 소리가 들어가면 나는 이 영화가 무조건 좋아져버린다. <어톤먼트>는 타자기 소리로 시작한다. 타자기를 두드리는, 이 모든 '속죄'를 이끌어가는 브라이오니는 결국 작가가 된다.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맞이한 것이다. 영화 전체를 이어가는 타자기 소리. 타자기 소리가 멈추는 시점, 브라이오니는 이 모든 이야기를 '어톤먼트'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한다. 이건 자신의 마지막 소설이 될 거라고, 아니 아니면 첫번째 소설인지도 모른다면서.
 
   <어톤먼트>는 반복의 연속이다. 똑같은 상황들이 반복되지만, 이를 극과 극으로 몰아넣는다. 여자와 남자는 사랑에 빠지는 행복은 이를 바라보는 여동생의 질투와 오해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반복된다. 남자가 여자 생각에 설레여하며 욕실 천장 밖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소리를 즐겁게 흉내내지만, 그 날 이후 비극으로 이어진 전쟁터의 남자 곁으로 웅덩이 너머 전투기가 날아가지만 남자는 더 이상 흉내내지 않는다. 빗나간 사랑은 질투를 불러일으켰고, 질투는 오해를 진실되게 만들었고, 거짓은 두 사람을 파멸로 이끌었다.


    이 모든 건 여자의 여동생, 브라이오니 때문이지만 영화가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왠지 제일 가여운 건 그녀다. 그녀는 일생을 자신으로 인해 비극이 된 두 사람에게 속죄하며 살아간다. 진실이라 믿었던 순간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스스로 발목에 쇠고랑을 채우고,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속죄한다. 제발 과거를 되돌릴 수 있기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기를. 하지만 언니의 말처럼 과거는 과거일 뿐, 돌이킬 수가 없다. 브라이오니는 속죄하기 위해 소설을 쓰고, 속죄하기 위해 허구를 만들어낸다. 어쩌면 이언 맥큐언도 무언가를 속죄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고, 조 라이트 감독도 어떤 것을 속죄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보는 관객들도, 읽는 독자들도 무언가를 속죄하게 될지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무나 많은 잘못들을 저지르며 살아가니까.

   영화를 보고 당장 읽고 싶은 마음에 동네 서점들을 찾아다녔는데, 출간된 지 오래 된 거라 그런지 책이 다 없더라.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주문했지만 배송되려면 내일은 넘겨야 될 것 같다. 배송되는동안 활자로 그려질 <어톤먼트>를 상상해본다. 여자는 어떤 문장으로 그려졌을까. 남자는 어떤 표정으로 그려졌을까. 브라이오니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릴까. 가여운 그 아이. 어쩌면 <어톤먼트>를 보는 내내 <속죄>를 떠올렸듯이 <속죄>를 읽는 내내 <어톤먼트>를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극장으로 달려갈지도.    
  1. BlogIcon 비디 2008.02.27 00:4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제 후임이 <속죄>를 보고 <어톤먼트>를 봤는데, 자긴 책이 더 좋다고 하네요. ^-^
    <속죄>를 보고 싶은데, 지금 읽는 책도 헥헥 거리니~ ㅠㅠ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2.27 09:23 신고 BlogIcon GoldSoul

      영화보고 책 읽으면 그 배우들 얼굴이 머릿속에 그대로 돌아다녀서요. 책 읽고 영화보려고 했는데 어디서 <어톤먼트>에 관한 글을 보고 바로 달려가버렸어요. 영화도 충분히 좋았어요. 그런데 책은 더 좋을 것 같아요. 배송 기다리고 있는 중이예요. :)

  2. 신비 2008.02.27 21:5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개인적으로는 원작을 먼저 접해보고 싶은 작품이라서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주변에 본 사람들 모두가 좋다고 하니, 그냥 영화를 먼저 봐버릴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 ㅋㅋㅋ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2.28 12:57 신고 BlogIcon GoldSoul

      저도 그런 마음이였는데요. 좋다는 말이 하도 많아서 그냥 먼저 영화를 봐버렸어요. 영화와 책 둘다 보신 분들 말을 들어보면 영화가 책을 그대로 옮기긴 했지만, 분명 다른 매력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봐버렸는데, 정말 좋았어요. <오만과 편견>때도 그랬는데. 이제 조 라이트 감독 영화면 무조건 봐야할 것 같아요. 오늘 <속죄> 도착해요. 저는 이제 책에 빠질 차례예요. :)

  3. assa 2008.02.29 15:0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볼 영화가 밀려있어요. 저영화도 볼생각이예요. 근데 극장에서 보게될진..- -

  4. BlogIcon 신어지 2008.03.02 17:16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포스터에 등장하지 않는 제 3의 인물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할 줄은 몰랐네요.
    <유레루>하고도 조금 비슷한 면이 있었던 작품이었어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3.02 17:50 신고 BlogIcon GoldSoul

      맞아요. 유레루. 신어지님 댓글 읽고 곰곰이 <유레루> 기억을 따라가봤어요. 정말 비슷했네요. 유레루에서도 그랬어죠. 남들이 보기에는 동생이 잘난 것을 더 많이 가진 것처럼 보였는데도 오다기리는 항상 형을 질투했었어요. 아, 갑자기 다시 보고싶어졌어요. 유레루. :)

  5. BlogIcon 아쉬타카 2008.03.02 22:4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마지막 인터뷰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슬프지 않았었는데,
    그 인터뷰를 듣고나니 영화 전체가 다 슬퍼지더군요 ;;

    저도 원작을 한 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3.03 09:23 신고 BlogIcon GoldSoul

      맞아요. 덕분에 마지막 장면이 너무 찡했어요. 저는 원작 읽고 있는 중이예요. 아주 속도를 많이 못 내고 있지만요. :)

  6. BlogIcon clotho 2008.03.07 12:3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는 사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맞닥드린 영화여서 그런지 약간 지루했어요. 초반에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괜찮았는데..
    마른몸을 가진 처자들은 그닥 취향이 아니라서 별로라고 늘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키이라 나이틀리의 매력은 대단하더군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3.10 19:00 신고 BlogIcon GoldSoul

      그 초록색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렸어요. 며칠 전에 원작책을 다 읽었어요. 영화보기 전에 읽었으면 더 좋았겠구나, 생각했답니다. :)

  7. 비틀쥬스 2008.03.27 09:1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며칠 전 이 영화를 봤어요. 다행히 극장에서 막을 내리기 전에...
    브라이오니가 너무 불쌍해서, 마지막 장면에 화면을 쳐다보며 속죄를 하는 그녀가 너무 안타까워서 안아주고 싶었어요. 괜찮아, 괜찮아라고...
    다시 한 번 느꼈지만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스님은 정말 연기의 여신.

    •  address  modify / delete 2008.03.28 00:33 신고 BlogIcon GoldSoul

      아. 아직까지 상영하고 있었나봐요. 다행이예요. 저는 어린 브라오니와 중간의 브라오니의 인상이 너무 확 변해버려서요. 마음 고생을 많이 했구나, 얼굴마저도 너무 착해버렸어, 라고 생각했어요. 원작소설은 마지막 브라오니 부분이 조금 달라요. 다음에 기회되면 한번 읽어보세요. :)

  8. 달빛아래 2009.10.27 22:4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아..그 동안 또 많은 일들이 있긴 했어요.
    작년 가을부터 올해 초까지는 호주에 가 있었고 올 봄부터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그런데 의욕이 앞서서인지 집중이 잘 안되네요.
    그래서 영화를 다시 찾아 본건데, 영화하면 전 이상하게 골드소울님이 생각나요.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놀러온거에요. :)

    그저께 my bluberry nights에 이어 오늘은 atonement를 봤네요.
    슬픈 로맨스 영화일줄로만 알았는데..
    엄청 울어버렸어요.

    속이 시원하네요.

    예전에 힘든 감정이 지나치게 커져버렸을 땐 영화도 눈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젠 활자에 집중이 안되니 다시 영화를 찾게되었네요.
    가끔 또 놀러올게요~
    발자국 남기지 않고 다녀갈 때도 가끔 있답니다.

    참, 친구들은 서른이에요. 제가 빠른 생일이라.
    친구해요 :)

    •  address  modify / delete 2009.10.28 23:28 신고 BlogIcon GoldSoul

      그랬구나. <어톤먼트> 좋았죠? 저 이거 그 때 조조로 봤나? 아무튼 혼자서 봤었는데, 참 좋았어요. 좋은 영화는 혼자보기에도 좋고, 혼자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요 영화가 제게 그랬어요. 원작소설도 좋아요. 시간 되시면 <속죄>도 읽어보세요. 영화랑 다른 느낌이예요.

      앗. 빠른 81이시구나. 네네, 좋아요. 친구해요. 뭐 나이가 적어도, 많아도 친구 할 수 있지만요. 가을을 만끽하세요. 많이많이 외로워하는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