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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리 타임즈 - 첫 장면과 사랑에 빠지다
    극장에가다 2008. 2. 11. 18:23

       1966년 대만의 어느 작은 당구장. 나무향과 담배냄새로 가득한 'Smoke Gets In Your Eyes'가 울려 퍼진다. 남자는 공을 치고 여자는 손을 허리에 댄 채 당구대 끝에 사각사각 초크가루를 바른다. 공들이 톡톡 부딪치고, 마음들이 퉁퉁 부딪히고. 이렇게 시작하는 영화. 이 첫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오랜만에 하루종일 극장 구석에 앉아 쉬지않고 연속으로 영화를 봤다. 허우 샤오시엔 특별전이었다. <쓰리 타임즈>에서 시작해서 <밀레니엄 맘보>, <빨간 풍선>까지. <카페 뤼미에르>까지 보고싶었는데 서기가 연속으로 출연하는 바람에 머릿 속에서 영화들이 뒤엉켜버려 포기했다. 일요일이였고, 봄처럼 따뜻했고, 오랜만의 광화문은 한산했다. 극장으로 가는 길에 커피도 한 잔 마셨다. 햇살도 정말이지 따스했다. 모든 게 영화보기에 완벽한 날이였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분명히 한 편 정도는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없었다. 그러니까 <쓰리 타임즈>는 내가 제일 처음 본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다.

       <밀레니엄 맘보>라고 생각했다. 표 세 장을 동시에 끊었으니 첫 영화가 <밀레니엄 맘보>라고 멋대로 생각해버리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언젠가 친구가 혼자 이 영화를 봤다고 했던 거 같은데. 낮에 봤는데 어둡고 아슬아슬해서 기분이 그랬다는 말을 들었던 거 같은데 영화의 처음이 너무 맑았다. '연애몽'이라는 제목이 떴다. 영화 내내 당구공처럼 마음을 톡톡거리다가 딱 한 번 남자와 여자가 비가 오는 길가에서 손을 잡았다. 음악이 흐르고 그게 전부였다. 딱 한 번 손만 잡았을 뿐인데 내 마음이 100만 볼트 전기가 통한 것처럼 찌릿찌릿거렸다. 그래, 저런 순간. 그리고 하얀 백지 위에 쓴 글자들이 등장한다. 그 글자들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내려가다보면 꼭 음악 하나가 나온다. '여긴 지금 비가 옵니다. 이 음악을 듣고 있어요.' 남자가 그렇게 편지를 쓰면 그 편지를 읽는 여자의 귀에 그 음악이 흐른다. 비는 눈물과 같다고. 하지만 맑은 날에 흐르는 눈물을 비라고 속일 순 없다고. Rain and Tears. 이렇게 맑은 <쓰리 타임즈>의 첫번째 이야기에 반해버렸다.


       두번째 '자유몽', 세번째 '청춘몽' 모두 어쩌면 첫번째 '연애몽'의 작은 당구장 건물, 그 땅 위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대만을 배경으로 시대가 다른 세 종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같은 얼굴을 하고 연기하는 배우들이 그렇듯 세 이야기의 공간들 다른 이름이지만 역시 같은 얼굴이 아닐까 하는. 그 곳에서 어떤 남자는 어딨는지 모르는 함께 당구를 쳤던 여자를 찾아가고, 어떤 여자는 남자에게 내 미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고, 어떤 남자는 여자가 두고간 '간질이 있으니 그냥 따뜻한 곳에 눕혀달라'고 쓴 팻말을 목에 걸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세 이야기에는 등장하는 문자. 쏟아져 나오는 말이 아닌 담겨져 들어가는 글자. 펜을 꾹꾹 눌러 쓴 설레임의 글자, 목소리를 대신하는 입술의 자막, 나를 봐주지 않는 너를 떠나며 쓰는 서글픈 키보드 소리. 그리고 음악. 마음을 움직이는 올드팝, 처연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전통음악, 직접 작곡한 음에 가사를 붙여 만든 '새'가 들어갔던 노래. 그런 날이 있다. 천 개의 궁핍한 말보다 음악 한 소절이, 단어 하나가 내 마음을 더 잘 전달해주는 그런 순간.

       나도 '연애몽'의 첫 장면과 같은 순간이 존재했는가 생각해봤다. 그렇게 음악이 흐르고 어떤 공간에 어떤 사람과 함께 마음이 퉁퉁거리던 때. 있긴 있었나. 어떤 날 어떤 음악을 우연히 듣게 되면 불현듯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아, 그 때가 있었지라고. 정말 사랑의 불꽃이 꺼져갈 때 그 연기가 눈가에 스며드는 걸까. 그래서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Smoke Gets In Your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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