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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굿 나잇 - 원하는 꿈을 꿀 수 있다면
    극장에가다 2008. 1. 23. 02:49

       안녕. 당신. <굿 나잇>을 보고나서 당신 생각이 났어요. 돌아오는 버스에 앉아선 우리가 처음 만난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어봤어요. 여름이였나, 봄이였나, 가을이였나. 꽤 오래되었죠? 그 때 처음 만났지만 당신은 우리가 여러 번 만나온 것처럼 내게 다정하게 대해줬어요. 꼭 여러 해 알고 지내온 것처럼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내가 아는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나를 꼭 안아줬을 때 그 품이 낯설지 않았거든요. 당신이 나를 토닥거려주었을 때 그 손짓이 왠지 익숙했거든요. 그 사람인가라고도 잠깐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아니였어요. 그건 확실해요. 그 사람은 쨍하고 눈부시게 스윙을 날린 뒤로 더 이상 나를 안아주지 않거든요. 누굴까. 당신이 누굴까. 왜 얼굴이 이리 보이지 않는걸까,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걸까, 답답해 하다 다시 누웠어요. 다시 당신을 만나려구요. 눈을 감고 다시 당신을 만나려고 애썼지만 결국 당신을 만나기는 커녕 무시무시한 꿈 괴물이랑 부딪쳐버렸어요. 헛스윙이였죠. 뭐. 그 뒤로 전 종종 당신을 만나길 바라면서 눈을 감지만, 매번 엉뚱한 사람들과 실랑이를 하다가 깨어나곤 해요.


       그러다 영화 <굿 나잇>에서 한 남자를 만났어요. 그 남자 이름은 개리. 한때 잘 나가는 밴드의 건반을 쳤고 유명한 곡들도 많이 작곡했었는데, 밴드가 깨지고 7-8년이 지난 지금의 그는 침체기예요. 슬럼프요. 그래서 영화나 광고 음악만 만들고 있어요. 개리는 미술관 큐레이터인 도라랑 오랜 연인이고 지루한 동거 생활을 하고 있어요. 의무적으로 사랑해, 나도, 그러는 거 있잖아요. 이제 서로를 봐도 가슴이 뛰거나 이리 저리 염탐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거죠. 마주 앉아 식사를 할 때 도라의 표정이 얼마나 심드렁했는지 알아요? 아, 도라는 기네스 팰트로가 연기했어요. 이 영화가 기네스 팰트로 남동생이 감독한 영화래요. 기네스 팰트로는 기품있고 우아한 얼굴이긴 한데, 우울하고 지루한 표정을 짓는데 정말 도사예요. 눈만 살짝 반쯤 뜨고 무표정하게 가만 있어도 아, 이 여자 지금 진짜 지루하구나, 단번에 느껴지거든요. 나까지 단번에 지루해져요.

       이야기가 갑자기 기네스 팰트로 쪽으로 빠졌네요. 미안해요. 좋아하는 배우거든요. 아무튼 개리는 어느 날 꿈에서 기가 막힌 여자를 만나는 거예요. 이국적이고 섹시하고 매력적인. 단번에 꿈 속의 그녀에게 사랑에 빠진거죠. 그래서 계속 그 여자를 꿈 속에서 만나고 싶어해요. 이를테면 시리즈 꿈을 꾸겠다는 거죠. 그게 말이 되요? 나도 당신을 만나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결국 실패했잖아요. 프로이트의 700페이지가 넘는 <꿈의 해석>도 샀다구요. 다 읽지도 못했지만. 개리도 엄청 노력해요. 일단 나처럼 꿈 관련 서적을 구입해요. 기본 코스인가봐요. 크크. 그리고 서점에서 기가 막힌 정보를 입수해요. 서점 주인이 원하는 꿈을 꿀 수 있게 해 주는 모임을 소개시켜 준 거예요. 개리는 그 곳에서 목표를 달성해요. <나홀로 집에>의 작은 도둑을 닮은 평범하고 가난한 그 모임의 주체자는 그따위 책은 집어치우고 잠 자기 전 손금에 집중하고, 전등 스위치를 몇 번 껐다 켰다를 반복하고, 수면제는 꿈 괴물을 만날 수 있으니 절대 금지하고, 어둡고 조용한 숙면을, 조깅을 하면 더 잠이 올 거라는 일상적인 진리들을 개리에게 가르쳐줘요. 개리는 아무래도 바보인지 그런 그의 지시들을 한번도 생각해보지도 못했다는 듯이 당신은 천재라면서 고맙다고 날뛰어요. 바보.


       결국 개리는 원하는 꿈을 계속 꾸게 되지만, 늘 원하는만큼 가지 못한채 잠에서 깨어나게 되요. 그리고 점점 꿈의 세계에 집착하게 되고, 현실을 등한시하게 되요. 원하는대로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그래도 슬럼프에 빠져있는 비루한 현실보다는 좀 더 나은 꿈의 세계가 개리에게 위안이 되는 거죠. 아, 나도 그랬는데. 그래서 그 때는 정말 낮이고 밤이고 잠이 오면 잠깐씩이라도 잤었어요. 그러면 늘 꿈을 꿨고. 그 꿈이 너무 좋아서 깨어있을 때도 늘 그 꿈 생각이였어요. 그런데 그 꿈이라는 게 휘발성이 강해서 그걸 조금이나마 붙잡아 두려고 메모라도 해두면 단번에 날라가버려요. 글자들에는 그 느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어요. 당신도 겨우 나를 토닥여 준 그 부분만 간신히 기억하고 있다구요. 그 느낌이 변질되는 게 싫어 일부러 메모해두지도 않았어요. 생각, 생각만 계속 했죠. 기억해두려고. 다른 부분은 죄다 날라가버렸어요.

        아, 개리 얘기 중이였는데 또 내 얘기를. 개리의 최후는 뭐 바람직했어요. 이상형이란 정말 이상형이잖아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람. 거기에 딱 맞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존재하겠어요?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던 연예인을 실제로 만나면 정말 그 사람이 내 사람라고, 단 1퍼센트의 실망도 없이 만족할 수 있겠어요? 오히려 내 머릿속에 그 사람의 이미지가 너무 굳어져 버려서 실제 그 사람의 모습에서 실망할 거예요. 그런 거죠. 뭐. 그렇다고 개리가 완전히 애나를 버린 건 아닐 거예요. 아, 애나는 개리의 꿈 속 여인의 이름이예요. 언제든 만나려고 하면 만날 수 있으니깐 생각나면 슬쩍슬쩍 도라 모르게 만날테죠. 꿈 속이니 들킬 위험도 없고,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사뿐사뿐한 연애도 맘껏 즐길 수 있겠다, 현실 생활에 대한 자각 능력만 잃어버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분명 다시 시도할 거예요. 나도 그럴 거거든요. 헤헤.


       그래서 말인데요. 오늘 당신을 만나려고 해요. 나도 개리처럼 내 손금 운명의 선에 집중하고, 낮과 밤의 경계선이자 현실과 꿈의 경계선인 전등 스위치를 반짝거리고, 따뜻한 이불 안에 들어가 누우면 까만 어둠 속에서 당신이 나타나 또 다시 그렇게 따뜻하게 안아줄지 누가 알아요? 당신이 다시 내 꿈에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 우리 오늘 만나요. 달달한 구름 위를 걸어보아요. 손을 내밀어서 내 지친 마음을 위로해줘요. 아, 내가 개리처럼 현실을 망각할 정도로 당신에게 빠지지 않는다고 질투하진 않을거죠? 나는 당신도 좋지만, 약간 비루하긴하지만 요 땅에 발바닥 딱 붙이고 맛난 음식을 킁킁대며 입 안 가득 음미할 수 있는 현실이 더 좋거든요.

       아무튼 굿 나잇. 오늘 밤 내 꿈에 와 줄거죠? 후후. 우리 이번에 만나면 통성명부터 해요.



       꿈이 자주 소원 성취의 특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을 보여 주기는 쉽다. 그래서 왜 진작 꿈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예를 들어 내가 종종 실험삼아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꿈이 있다. 소금에 절인 생선이나 올리브 등의 아주 짠 음식을 저녁 때 먹었다면, 나는 잠에서 깰 정도로 한밤중에 갈증을 느낀다. 그러나 깨어나기 전 매번 같은 내용의 꿈을 꾼다. 즉 물을 마시는 꿈이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마시는데, 진짜로 무척 목이 말라 고생하다가 시원한 물을 들이킬 때처럼 맛이 아주 좋다. 그런 다음 잠에서 깨어나 실제로 물을 마셔야 한다. 이 단순한 꿈의 동기는 깨어날 때 느끼는 갈증이다. 갈증에서 물을 마시고 싶다는 소원이 생겨나고, 꿈은 이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

    p.164-165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세번째 장, 꿈은 소원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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