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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거짓말 - 서울내기같은 그녀의 소설들
    서재를쌓다 2008. 1. 15. 22:25
    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문학과지성사


       정이현 작가의 소설은 <달콤한 나의 도시>에 이어서 두번째예요. 첫번째 단편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은 읽을 생각만 하다가 아직까지 못 읽었어요. 지난 여름 강연회에서 새 책에 사인까지 받아와 놓고서는 고이 책장에 모셔두다가 얼마 전에 잃어버렸어요. 마침 동생이 이 책을 선물받아 왔던 게 있어서 바로 읽긴 했는데, 한 집에 같은 책 두 권이 뭐가 필요있냐고 그렇게 된건지. 누군가 주워서 읽고 있겠죠? 잃어버리니 <오늘의 거짓말>을 빨리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책마저 사라지기전에.

       정이현 작가는 서울내기 같아요.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을 한번도 떠나 살아본 적 없는 사람이요. 실제로 프로필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구요. 제가 지방에서 올라와서 그런지 서울내기들은 딱 보면 알 수 있어요. 저같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딱 보면 알 수 있구요. 사투리를 쓰지 않아도, 얼굴에 그렇게 써져 있는 것도 아니고, 별다른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닌데 그래요. 그런데 그녀를 닮은 그녀의 소설도 서울내기 같아요. 사투리 섞인 대화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소설 어딘가에 그런 딱지가 붙여져 있는 것도 아니고, 책에서는 단지 종이와 글자 냄새만 날 뿐인데 그래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아온, 그래서 지방에 잠시 내려갔다가도 서울 톨게이트 팻말이 보이기 시작하면 안심이 되는 서울내기의 소설 같아요.  

        재밌고 빠르게 읽었어요. '타인의 고독'과 '삼풍백화점'은 예전에 문학상 수상집에서 읽었는데, 다시 읽어도 좋았어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엉엉 울면서 썼다는 '삼풍백화점'. 저는 이 단편이 참 좋아요. 냉소적인 시선이 가장 많이 들어간 '어금니'의 무표정함도, 박정희 대통령이 윗집에 살고 있다는 '오늘의 거짓말'의 상상도, 자꾸만 내 몸을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보게 되었던 '그 남자의 리허설'도, 자판기 밀크 커피에서 스무살의 맛을 느끼는 한 여고생의 '비밀과외'도, 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빛의 제국'도, 둥그렇고 말아 뻣뻣하게 올렸던 그 때의 앞머리를 생각나게 했던 '위험한 독신녀'도, 소설가들은 늘 이렇게 메마르고 건조한 부부만 그린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결혼생활은 다 그런 거겠지, 라고 결론을 내어버린 '어두워지기 전에'도, 항문을 찍은 사진을 보고 흥분하는 '익명의 당신에게'까지. 재밌고, 공감했지만, 끄덕거렸지만, 뭔가 허전한 구석이 있어요. 가려운 부분을 긁긴 한데 시원하게 박박 긁지 못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녀를 다음 번에도 꼭 다시 만날 거지만, 이번에 만나고 뒤돌아서는 순간 왠지 우리가 더 깊이 내려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드는 그런 허전함이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떠들어대야 하는 거 아닌가, 발라당 넘어지는 실수 한 번쯤 해서 무안하게 웃다가 같이 크게 웃어버리고 그런 순간들이 있어야 했던 거 아닌가 하구요.  

        학교를 서울에서 다니면서 새 친구들을 사귈 때 서울사람이라고 그러면 왠지 불편하고 쉽게 깊어지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아, 지금 생각해도 이 생각 너무 촌스러워요. 지방에서 올라온 우리끼리 '서울사람'이라는 호칭을 써가면서 이야기하고 그랬거든요. 물론 그러면서 친해진 친구들도 있었지만, 같은 지방 사람이라면 사투리를 쓰지 않아도, 인사를 하면서부터 편안해지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좀 더 내가 먼저 다가가고 싶다, 이 사람에게는 내 부족한 면들을 보여줘도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촌스럽게도 서울에서 생활하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그런 면이 남아 있어요. 아, 촌스럽다.

       아무튼 자꾸 만나고 싶어요. 자꾸 그녀에게 관심이 가요. 그리고 좋아지기 시작해요. 그녀의 새초롬해 보이는 이야기도 좋고, 조금 차가워 보이는 시선도 좋아요. 실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 것 같구요. 다음 번에는 우리의 관계가 좀 더 깊어지길 바래요. 실수 하나씩 하고, 이번보다 좀 더 크게 떠들면서 이야기 나눠요. 그 때는 소주 한 잔 어때요? 달큰하게 취해가면서. 헤헤. 오늘의 거짓말이 내일의 거짓말이 되지 않길 바래요. 두번째 만남, 즐거웠어요. 그나저나 잃어버린 책은 포기해야겠죠? 그 책이 가방에서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는 게 오늘의 거짓말이길 바랬지만, 결국 오늘의 진실이였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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