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푸른 알약 - 거리에서 흰 코뿔소와 마주칠 확률
    서재를쌓다 2008. 1. 13. 02:29
    푸른알약푸른알약
    프레데릭 페테르스 지음, 유영 옮김/세미콜론


     

        꽤 오래되었어요. <푸른 알약>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요. 'TV, 책을 말하다'에 한창 빠져있던 때 소개되었던 만화책이였어요. 실제 작가 자신의 경험이 고스란히 들어간 작품이여서 충격적이었고 유럽에서 인기도 꽤 끌었다고 해요. 내용이 에이즈에 걸린 여자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거든요. 여자의 전 남편 사이에 태어난 아이도 에이즈에 걸렸구요.

       그러니까 '어느 날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와 그녀의 아이가 에이즈라고 한다. 그런 하찮은 에이즈따위는 우리 사랑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이렇게 견고한 우리들의 사랑을 보라.' 이런 내용은 절대 아니구요. 작가임이 분명한 이 만화책 속의 주인공 남자는 자신이 사랑에 빠진 여자가 에이즈라는 사실을 알고 주위가 깜깜해지면서 심하게 충격을 받기도 하고, 함께 살게 된 뒤에도 어느 날 관계 중에 콘돔에 구멍이 나 있던 사실을 발견하고 다음 날 의사를 만나기 전까지 오직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초조하게 밤을 꼴딱 새는 보통의 사람이라는 거지요. 아니, 어쩌면 그는 조금 용감한 남자예요. 그녀와 함께 살기 시작했으니까요. 꽤 큰 결심인 거잖아요. 아니, 그는 용감한 남자예요. 에이즈에 걸린 그녀의 아이까지도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말이 쉽지 그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요. 아니, 그는 정말 용감한 남자예요. 에이즈라는 질병에 무지한 자신을 조금씩 깨뜨리기 시작했고, 여전히 에이즈따위 아무 상관없는 건 아니지만 조심하면 된다는 것, 사람들이 벌벌 떠는 그 병균 덩어리 속에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걸 이렇게 만화책으로까지 내어서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랬으니까요. 어쩌면 이 책의 작가는 용감하지 않은 것같은 주인공을 내새워 제일 용감한 척하는 사람인지도 몰라요.

       '고맙습니다'의 봄이도 있었고, 이번에 하는 드라마 '뉴하트'에서도 에이즈때문에 시끄럽던데요. <푸른 알약>에서 강조하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게 옮는 병이 아니라는 거예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끔찍한 밤을 보낸 뒤 두 사람이 찾아간 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상대에게 에이즈가 감염될 확률은 지금 이 방을 나가서 흰코뿔소와 마주치게 될 확률과 같다'구요.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말라구요. 단지 조금만 조심하면 된다구요. 그 뒤 조그만 상처만 발견해도 병원으로 쪼르르 달려오는 남자에게 의사는 더 이상 이런 하찮은 일로 병원에 오지말라고, 에이즈는 그렇게 쉽게 옮는 병이 결코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해요.

       이것이 이 만화의 장점이기도 해요. 의연한 듯 에이즈따위 신경쓰지 않는다며 에이즈 보균자와 살아가는 사람이 실제 얼마나 되겠어요? 우리가 그 질병에 지나치게 무지하고, 그래서 에이즈가 더 두려운 것처럼 주인공 역시 그래요.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물어보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어떤 날은 걱정하면서 밤을 세우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치료받는 아이를 옆에서 직접 돌보면서, 자신의 에이즈때문에 결국 아이까지 보균자가 되었고 사랑하는 남자에게까지 옮기게 되면 자신은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자책하는 그녀를 달래면서 남자는 조금씩 막연했던 에이즈라는 병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만화의 끝에서도 그 긴 여정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구요. 푸른 알약은 치료를 위해 먹어야 하는 약이예요.

       이 책을 'TV, 책을 말하다'에서 소개받을 때 한 패널이 이런 말을 했어요. 이 작가가 이제 겨우 1년 같이 살고 책을 낼 것이 아니라 좀 더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책을 내었다면 더 가치있지 않았겠느냐구요. 만화책을 넘기면서 자꾸 그 때 그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는 거예요.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확실해졌어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많은 경험들이 열정으로부터 우리를 무덤덤해지게 만들고, 많은 경험들이 상처로부터 우리를 아물게 만들어 주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10대가, 우리의 20대가 소중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비록 이별뿐이였던 20대라도 그것이 존재했다는 자체도 소중한 거잖아요. 저는 사랑으로부터 열정적이고, 에이즈로부터 파닥파닥 떨었던 작가의 그 1년이 어루만져 주고 싶었어요. 이쁘잖아요. 미리 나중에 지쳐서 떨어져 나갈 수 밖에 없을거다, 너희 사랑의 끝은 뻔하다, 말할 필요 없잖아요. 두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함께 살든, 책을 내고 얼마 안 돼 헤어지든 이 책의 1년은 그것 자체로 소중한 거 잖아요.

       어두운 도시에 갇혀 까만 배경으로 자주 표현되었던 초반부에 비해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여백의 하얀 배경이 많아져요. 작가 자신의, 주인공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는 거겠죠. 사랑도 없고 그저 흘러가기만 했던 무미건조했던 하루하루가 사랑이 가득하고 늘 가슴 조이게 만드는 생각치도 못했던 에이즈라는 녀석의 출현으로 스펙타클해지고 하루하루의 일상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저는 그렇게 제멋대로 생각해봤어요. 현실의 거리에서 흰코뿔소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일은 0.0000000000001%에 불과하겠지만, 상상의 거리에서는 흔한 일이예요. 상상만 시작한다면 언제든 만나서 하이,하고 외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상상의 거리에서 나를 늘 쫒아다니는 그 흰 코뿔소와 모퉁이에서 안녕을 고하고 헤어지는 일도 쉬운 일이예요. 상상만 하면 되니까요.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