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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 없는 사람 - 커트 보네거트, 당신을 이제서야 만납니다.
    서재를쌓다 2008. 1. 8. 18:35
    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문학동네



       커트 보네거트. 소설은 아니지만 그의 이름으로 된 책 읽은 것은 이번에 처음입니다. 워낙에 유명하신 분이니 여기저기서 이름을 들었고 언젠가 읽어야지, 내내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나라 없는 사람>을 읽는데 첫 수필이 익숙하다 생각이 들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판타스틱>이라는 잡지에서 그의 죽음을 기리면서 단행본으로 출간하기에 앞서 수필 한 편을 소개했던 것을 읽었던 기억이 있었어요.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2008년 첫 책으로 이 책을 읽게 된 건 정말 잘 된 일이다, 이제 좋은 책들만 읽게 되는 한 해만 읽게 될 계시인 것이다, 라고 생각을 했을 정도로 짧지만 강한 책이였어요.

     

       우선 김애란 작가 이야기예요. 지난 해 낭독회에서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김애란 작가가 얼마 전에 이 책을 읽었다고 했어요. 이 책 속의 서사에 관한 그래프가 있는데 이 선의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져서 그걸 오려서 작업실 벽에 붙여놨다고 했어요. 햄릿의 그래프는 일직선뿐이라는 이야기도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궁금했었어요. 그 그래프의 곡선들에 관해서요.   

     

       '문예창작을 위한 충고'에 이 그래프들이 있었어요. 다섯 종류의 이야기에 대한 거예요. '구덩이에 빠진 남자'의 그래프는 구덩이를 닮았어요. 행운에서 시작해서 불운으로 이어지고 행운으로 마무리되는 곡선이예요. '소년, 소녀를 만나다' 그래프는 행운으로 솟아올라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불운으로, 그리고 행운으로 끝나요. '신데렐라'의 그래프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불운에서 시작해요. 계단식으로 차츰차츰 행복해지다가 불운으로의 절벽을 맞이한 후에 행운의 무한대로 신데렐라는 날라가요. '카프카'는 불운의 무한대, '햄릿'의 그것은 불운도 행운도 아닌 곧은 직선만이 존재할 뿐이예요. 저도 김애란 작가가 아름답다고 표현한 이 곡선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어요. 제 눈에 아름답지까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야기를 부드러운 곡선같은 마음이 느껴졌죠. 김애란 작가의 그 마음두요.

     

       제일 신났던 수필은 '러다이트의 즐거운 나들이'예요. 컴퓨터를 쓰기 전에 타자기로 글을 쓸 때의 이야기예요. 글을 쓰고 연필로 사각거리며 간단한 교정을 한 뒤 카피라이트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한 수다를 떨고 새로운 글을 타이핑해 줄 수 있겠냐고 부탁의 전화를 끝낸 뒤, 아내에게 봉투를 사러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길을 나서요. 항상 가는 가게에서 봉투를 사고, 항상 가는 우체국에 들러서 우표를 붙이면서 우리들에게 자신은 사실 우체국 아가씨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고백을 하죠. 그리고는 우체통에 봉투를 넣고 집에 돌아오는 이 간단한 나들이를 쓴 글인데 그가 이런 행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생생히 느껴져요. 왜 그가 봉투를 대량으로 구입해 놓고 쓰지 않는지 이 글을 읽으면 단번에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요. 저도 이런 사소한 즐거움을 무척이나 사랑하거든요.

     

       커트 보네거트는 책 속에는 미국에 대한, 지식인들에 대한, 석유 소비에 대한. 환경에 신경쓰지 않는 것에 대한, 전쟁과 침략에 대한, 이 세상의 모든 차별에 부조리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배웠다고 말하는 우리들이 얼마나 현재에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지금 풍요롭게 살기 위해 얼마나 미래를 고갈하고 있는지를 알아야한다고, 정말 모르는 거냐고 이야기해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했어요. 거트 보네거트가 지금 살아 있다면, 우리나라의 서해안 석유 유출 사건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하구요. '그것 봐. 내가 그랬잖아.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하구요.

     

       박찬욱 감독님이 <제5도살장>인가, <고양이 요람>을 무척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읽었던 것 같아요. 이제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읽을 거예요.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알았으니 그의 소설들이 더 잘 이해될 것만 같아요. <제5도살장>을 먼저 읽을까요? <고양이 요람>을 먼저 읽을까요? 앗. 그가 '문예창작을 위한 충고'에서 세미콜론을 쓰지 말라고 충고했는데, 이렇게 많이 쓰다니요. 심지어 이 문장에서까지도. 아, 저는 좋은 문장을 쓸 수 없는 걸까요? 거트 보네커트. 당신이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된 후에야 나는 당신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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