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모퉁이다방 2007. 5. 21. 15:40

     

        일년에 한번씩은 꼭 꺼내서 보고 싶은 영화들이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영화와 책도 그리고 그 속의 주인공들도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마음에 들었던 영화를 시간이 지난 후 여러번씩 보기 시작한 이후에 알게된 사실이지요. 제가 나이를 먹듯 영화와 책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래서 처음 볼 때와 두번째 볼 때, 세번째 볼 때에 공감되는 주인공이 달라지고, 이해되는 그이들의 정서가 달라지고, 눈물이 쏟아지는 순간들이 달라지곤 합니다. 제게 그런 영화가 두 편 있는데요. <봄날은 간다>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입니다.

        오늘 저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다시 살포시 꺼내봤습니다. 조제를 처음 만났건, 유난히도 추웠던 작은 종로의 어느 극장에서였습니다. 저는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갔는데, 어떤 한 여자분이 혼자 영화를 보러 오셨어요. 토요일 마지막 타임의 영화를요. 그리고 식사를 걸렸는지 햄버거를 영화 시작 전에 허겁지겁 먹고 있었어요. 쫄쫄거리며 콜라를 들이키고, 짭짤한 포테이토도 우걱우걱 씹어가면서요. 그리고 영화 시작했습니다. 제목도 마음에 들고, 배우들도 마음에 드는 이 영화는 무덤덤한'척' 사랑을 시작하고 담백한'척' 사랑을 끝내는 두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주인공인 조제가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긴 했지만, 그 불편따위는 이 영화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고, 시간이 지났고, 단지 지루해진거죠. 우리들의 사랑이 그렇듯이요. 하지만 그 담백한'척'하는 이별이라는 게 너무나 담담해서 마지막에 남자 주인공, 츠네오가 그렇게 길거리에서 엉엉 울어주지 않았다면 저는 그 두 사람의 사랑의 존재라는 걸 믿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어요. 다행이였어요. 그가 그렇게 엉엉 울어줘서. 츠네오의 동생이 제사에 못 간다는 형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형 지친거야?" 라고 묻고, 이어지던 츠네오가 조제를 바라보던 눈빛은 잊을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 앉았던 그 여자. 버거킹 햄버거 세트로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토요일 마지막타임 영화를 혼자 보러 왔던 옆자리의 그 여자가 영화가 끝나고도 자리에 남아 계속 눈물을 닦아내더라구요. 주루룩 계속 눈물이 흐르는지 자꾸만 휴지로 얼굴을 닦아내던 그 여자분을 뒤로 하고 영화관을 나섰던 왠지 무척이나 쓸쓸한 토요일 그날 밤으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1년 뒤, 광화문의 한 극장에서 재상영을 하였고, 그렇게 두번째 조제를 만났습니다. 역시 추운 겨울이였는데, 영화가 끝나고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걸어오면서 저는 처음으로 영화의 끝장면처럼 조제가 이 도시 어딘가를 힘차게 휠체어를 끌고 달려가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조제에게 편지를 썼어요. 쑥스럽지만요.

    조제, 안녕? 잘 지내니? 어떻게, 요즘도 휠체어는 몰고 다니니?
    너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 휠체어를 탄 남자를 만났어.
    그 남자애는 커다란 치마입은 여자애를 옆자리에 떡하니 태우고
    사람들 보란듯이 신나게 운전해대며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질주하더라.
    너는 어떠니? 여전히 물고기를 굽고 있지? 맛있는 계란말이와 함께.
    그런데 이건 좀 이상하지 않니?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너는 그렇게 물고기를 좋아했으면서
    늘 죽은 물고기를 맛나게 굽고 그걸 밥에 얹어 먹어댔잖니.
    어쩐지 논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해.
    뭐 니가 그게 뭐 어때서, 라고 볼멘소리로 말한다면
    나도 할말은 없지만 말이야.
    조제, 여긴 이제 겨울이야. 왠지 쓸쓸한 느낌이 들지만 난 겨울이 좋아.
    어딘가 니가 나는 한번도 가 본적도 없는 오사카 한 귀퉁이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니가 존재했음 좋겠다.
    그렇다면 왠지 마음이 한순간 따뜻해질 거 같애.
    조제... 츠네오는 가끔씩 니 생각 하나 보더라.
    그때 니네 둘이 찍은 여행사진을 가끔 보나봐.
    츠네오는 조제는 두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래.
    조제도 그래? 가끔 생각나?
    그런 아이따위, 라며 볼이 퉁퉁 부운채로 말하겠지?
    나는 그런 조제가 참 좋아. ^ ^
    또 나중에 보러 올께.그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야 해.
    겨울냄새와 조제는 닮았어.
    -2005년 서울에서

        그 이후, 여전히 일년에 한번씩 저는 조제와 츠네오를 만났습니다. 영화 속에서 조제와 츠네오는 늘 그자리에 변함없이 나를 맞이해줘요. 올해 겨울은 우리 세 사람의 네번째 만남쯤 되겠네요.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