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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연의 상처따위 쿨하게 날려버릴 '함박 스테이크'
    모퉁이다방 2007. 12. 20.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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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몇 년 전이네요. 자주 가는 블로그가 있었어요. 글을 맛깔나게 잘 쓰셔서 몰래, 흔적없이 다녔던 블로그인데요. '실연 당한 후 먹은 돈까스'에 관한 글이 있었어요. 그 글이 너무 좋아서 블로그에 들어갈 때마다 찾아서 읽고 또 읽고 그랬죠. 그러면서 내 실연에 관해서 생각하고, 내 실연 후에 선배가 사주었던  복분자 술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어요. 그 블로그도 없어져 버리고, 저도 쭉 그 글을 잊고 지냈었는데 작년 겨울, 친구 결혼식 즈음해서 후배에게서 메일이 왔어요. 이 메일 기억하느냐고. 예전에 제가 후배에게 썼던 메일에 답장을 써서 보냈는데. 그 때 저는 그 글이 너무 좋아서 복사를 해서는 후배에게 보내는 메일에 함께 보낸 거예요. 그렇게 그 글이 살아서 제게 돌아왔죠. 그 때 제가 미니홈피에 흔적을 남겨두었던 글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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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스물 한 살때, 지금 생각해보니 사소하지만 그때는 심중했던 실연의 상처에 잠시 몸부림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내 방에 찾아왔던 5살 연상의 선배 언니가 있었다. 삼박사일동안 소주와 담배만 조져댄 내 몰골을 본 언니, 말없이 나를 질질 끌고 집 근처의 기사식당에 데려갔다. 안 먹겠다고 앙탈을 부리는 나를 앉혀두고 대왕만한 돈까스 두 접시를 시켜 손수 먹기좋게 잘라준 그녀. 난 여전히 안먹겠다고 버둥대는데 억지로 포크에 꽂힌 돈까스를 입에 밀어넣었다. 오오! 그런데 이게 웬 천상의 음식이냐. 한입 먹는 순간 너무 맛이 있어서 그만 쉬지않고 돈까스 두 접시와 밥과 수프를 해치워 버렸다. 그런 다음 식당 밖으로 나와 샐렘 담배를 한대 피워물고 차가운 콜라 한 캔을 들이키는데 그만 마음의 상처 따위 어디론가 모두 사라져 버려서...

       예전에 자주 가보곤 했던 블로그에 이 글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이 글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는데, 얼마전 후배에게 메일이 왔다. 2년 전에 내가 썼던 메일에 답장버튼을 눌러 보낸 거였는데, 그 때 후배에게 이 글이 너무너무 좋다며 복사해서 보냈었다.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
    얼마나 쿨하고 맛깔스럽게 실연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느낌인지. 눈을 감고 그려봐도 그 맛있는 느낌이 생생했다. 여전히 식도를 타고도는 전 날의 역한 소주 냄새. 모락모락 맛있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기사식당 왕돈까스. 탄산방울들이 식도에 탁 걸리는 시원한 콜라 한 모금. 슬리퍼에 쭈그리고 앉아 피는 담배 한 개피. 그리고 사라지는 실연의 상처'따위'

       2년 전 그 때 나는 돈까스'따위' 뿌리치는 심각한 몰골의 후배에게 감정이입이 됐었는데 지금 이 글을 다시 읽어보니 실연'따위'로 기사식당 왕돈까스를 뿌리치는 후배 등짝을 한 대 세게 때려주고 심각한 몰골의 입에 돈까스 한 입을 넣어주는 선배가 눈에 보인다.

    - - - - -

       기사식당 돈까스는 아직까지 먹어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또 실연을 당하게 된다면 꼭 혼자서라도 기사식당에 가서 그 크고 맛난 돈까스를 꾸역꾸역 먹고, 콜라를 한 모금 마신 후 실연의 아픔따위는 쿨하게 삼켜버리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어요.

        기사식당 돈까스는 아니지만, 정성이 들어간 함박 스테이크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의 상처에 고소한 빵가루와 신선한 다진 야채들을 넣고 조물조물 치대고 지글지글 맛나게 구워내어서 칼로 쓱삭쓱삭 잘라서 아픔따위 한 입에 먹어치울 수 있는 그런 함박 스테이크요. 어릴 때 먹었던 동네 조그만 레스토랑의 그 맛도 생각이 나기도 하는. 그리고 가까운 누군가가 실연을 당한다면 정성들여서 스테이크를 만들어서 꼭 몰골의 입 속으로 한 입 넣어주고, 이 세상이 그 사람이 없어도 얼마나 맛있는 세상인지를 단번에 깨달게 해주고 싶어요.


       자, 요리 시작합니다. 처음이라서 실수 연발이였지만 제법 맛난 녀석이 완성되었어요. 사진을 잘 못 찍어서 맛나게 보일지는 모르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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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파크 마트에서 구입한 재료들 중에서 함박 스테이크에 넣은 것들이예요.

    재료
    돼지고기 간 것 300g
    소고리 간 것 300g
    양파 하나  
    계란 하나
    새송이 버섯
    파프리카
    대파 하나
    치즈

    당근 하나
    빵가루 조금
    굴소스 2스푼
    소금, 후추 약간
    (요건 집에 남아 있는 걸로 해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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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양파랑 당근은 잘게 다집니다. 대파도 다져서 준비합니다.
    스테이크에 곁들일 야채는 길게 채썰어줍니다.
    저는 색깔이 다른 파프리카 반쪽씩이랑, 새송이 버섯, 팽이 버섯, 양파를 준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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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진 돼지고기, 소고기랑 다진 당근, 다진 양파, 다진 파랑 빵가루 약간과
    짭짤하게 간을 해줄 굴소스 2스푼을 넣습니다.
    아, 계란 하나도 깨서 넣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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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심히 치댑니다. 끈적끈적할 정도로요.
    많이 치댈수록 좋다고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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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당한 크기로 빚어줍니다. 큰 마요네즈 뚜껑을 이용하면 딱 맞는다고 하던데
    저희 집에는 없어서요. 대충 손으로 빚었어요. 너무 크게 만들어서 배 불러 죽는줄 알았어요.
    당장 해 먹을 것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잘 싸서 냉동실에 보관하면 나중에 해동해서 드시면 되요.
    저는 크게 만들어서 여섯 덩어리 정도 나온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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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라이팬에 기름 살짝 두르고 구워요.
    딱 한번만 뒤집는 게 육즙도 안 빠져나가고 좋다고 해서 안 뒤집고 있다가 좀 태웠어요.
    적당히 익어가는 색깔을 보시면서 뒤집으세요.
    구우면서 고기 모양이 흐트러지면서 틈이 생기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럴 경우에는 치즈를 올리면 된다고 해요.
    그래서 하나씩 올렸어요.

    체다 치즈를 주문했는데, 덤으로 하얀색 칼슘 치즈까지 왔어요. 흐흐-
    남은 거는 하얀 칼슘 치즈 올려서 먹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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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늘을 얇게 썰어서 기름 약간 둘러서 향을 내고 준비한 버섯과 야채를 넣고 살짝 볶았어요.
    야채를 깔고 그 위에 스테이크를 올리고 바베큐 소스를 뿌려서 먹었는데요.
    너무 잔뜩 뿌리는 바람에 소스맛이 강했다는.
    나중에 먹을 때는 집에 스테이크 소스가 있는 걸 발견하고
    바베큐 소스랑 스테이크 소스를 반씩 섞고, 핫소스 조금이랑 물도 반 컵쯤 넣고요.
    다진 마늘도 넣고 끓여서 만들어 먹었는데 그게 훨씬 낫더라구요.

    감자도 두, 세개 삶아서 마요네즈랑 다진 당근을 약간 넣어서 감자 샐러드도 만들었어요.
    조그만 커피잔 같은데에 넣어서 모양을 잡아서 접시 위에 올려주면 좋아요.
    밥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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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입니다. 쩝쩝거리면서 맛있게 먹었답니다.
    맥주도 한 병 사와서 요리하는 동안 차갑게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꺼내 먹구요.
    맛있었어요. 실연의 상처따위는 쿨하게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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