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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택시블루스 - 저는 그냥 여기서 내려주세요
    극장에가다 2007. 12. 18. 14:59
        TVN에서 하는 택시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영자와 김창렬이 번갈아가면서 택시 운전을 하고 손님을 태우고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인데요. 많이 보지는 않았는데요. 보면 간혹 지나가던 진짜 손님을 태워 주기도 하는데, 주로 초대된 연예인들을 태우고 근황들을 물으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택시 안의 토크쇼 형식의 프로그램이예요. 이 프로그램이 좋았던 건 어느 날의 기억 때문이였어요. 좋은 사람들이랑 오래간만에 얼큰하게 술 한잔을 하고 지하철이고 버스고 다 끊겨서 택시를 잡아 탔던 밤이였는데요. 택시 안에 라디오가 흘러나왔어요. DJ 목소리가 익숙했는데 누군지는 확실히 모르겠어요. 조금 나이가 있으신 분이셨는데요. 멘트가 멋졌어요. 어떤 노부부가 저녁 모임을 위해서 한껏 차려입고 나가려는데 부인이 남편에게 나 오늘 어때요, 라고 물으니깐 당신 오늘 최고야, 라는 식의 멘트였어요. 오늘 당신 정말 원더풀이라면서 에릭 클랩튼의 Wonderful Tonight을 틀어줬어요. 그 순간 택시는 한강 다리 위를 건너고 있었고 택시 안은 정말 원더풀이였죠. 예전에 베스트극장에서 본 이윤정 PD가 연출한 '매직 파워 알콜'에서 김민선이 탔던 따뜻했던 택시가 생각이 났어요. 그날 밤은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정말 기분 좋은 꿈을 꿨을 거예요.

       제가 생각한 택시는 그런 택시였거든요. 그렇게 따스하진 않을 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삭막하고 절망적인 택시일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중간에 내리고 싶었어요. 한쪽 손을 이렇게 들고 저는 여기서 내려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극장 앞 자리에 앉아서 그런지 화면을 보는데 멀미가 나는 것 같기도 했구요. 그런데 이건 내릴 수 없는 택시였어요. 일단 이 영화를 잡았고, 뒷문을 열었고, 탔고, 행선지를 말했으니 거기까지 가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예전에 에릭 클립튼을 틀어주었던 택시 안 기사분(그때는 제가 행선지를 말하고 택시비를 지불하는 것밖에 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일지도 모르는 그이의 이야기를 듣는 거예요. 택시 안의 이 삶이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그리고 뒷자리의 우리들이 얼마나 절망스러운지를요.


       영화는 제게 말합니다. 니가 기억하고 있는 그 날의 따스했던 택시의 풍경뿐이냐고. 저는 뜨끔합니다. 그래요. 아니예요. 그건 제가 기억하고 싶은 택시였어요. 영화가 보여주는 뒷자리의 풍경들이요. 술에 취하고, 돈에 취하고, 사람에 취한 모습들이요. 그게 사실 저예요. 언젠가 잔뜩 술에 취해서 택시를 탔어요. 일행 중 누군가가 달려왔는데 저는 취해서 출발한 뒤였죠. 편하게 택시를 타고 도착했던 기억만 있는데, 친구는 그 날 니가 모범택시를 잡길래 놀랬다고 했죠. 저도 놀랬죠. 요금이 분명히 많이 나왔을텐데 그 날의 제 기억에는 모범택시를 타지 않았거든요. 어느 날은 친구가 택시를 태워줍니다. 저는 등을 바짝 세우고 일부러 택시 아저씨가 들으라고 크게 전화통화를 하고 문자를 끊임없이 보내요. 요즘 택시 강도 사건이 많아, 늘 가던 길로 가질 않는다, 이 아저씨가 수상하다, 식의 문자를 내릴 때까지 보내죠. 그리고 더 말 못할 진상의 풍경들이 있었어요. 영화 속 바로 그 자리에서요. 누구도 아닌 제가 말이죠.
     
       영화는 그저 택시 안을 끊임없이 보여줍니다. 손님을 태우고, 내리지 않으려는 취한 손님을 끄집어 내고, 천천히 가자는 손님에게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고 하고, 남편에게 맞는 손님을 태우고 도망가고, 아이를 품에 안고 이제 더이상 그 인간이랑 못 살겠다고 전화통화하는 손님을 훔쳐보고, 돈을 던지는 손님을 쫓아가 한 대 때려주고, 가난한 생활에 그림이 그리고 싶어 소주 한 병과 글자가 프린트 된 책장 위에 그림을 그리는 손님의 방을 따라가고, 치여 죽은 길냥이 곁을 빙글빙글 돌고, 여름의 끝자락에 살겠다고 목 몰아 울어대는 매미가 뒷좌석에 탑승하기도 합니다. 이 택시블루스의 운전자인 감독인 그 매미를 조심스럽게 손가락 위에 얹혀 놓고는 이리저리 더듬어 보다가 창 밖으로 매미를 놓아주려 합니다. 돌아가렴, 매미야. 매미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요. 어디서 생애 마지막 시간들을 울어대야 하는 걸까요. 아니, 살겠다고 울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저의 착각일까요. 매미는 더는 이 곳에서 살지 못하겠다고 울고 있는 건 아닐까요.


       1시간 45분이 지납니다. 택시 운전자는 제게 다 왔다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또 빨리 살아 나가기 위해서 달려야 하니 되도록이면 빨리 내려달라고 합니다. 저는 염치없게도 요금도 지불하지 않고 내립니다. 그런데 제가 말한 행선지가 아니예요. 출발한 그 곳이잖아요. 그럼 뱅뱅 돌아서 결국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온 건가요. 따져볼 시간도 없이 그가 출발합니다. 택시의 뒷모습을 봅니다. 내가 탔던 그 뒷 자리에 개가 앉아 있어요. 멍멍 개요. 우리, 잘 살아가고 있는 거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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