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친절한 복희씨 -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겠어요?
    서재를쌓다 2007. 12. 10. 17:19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문학과지성사
     
       몇 해 전에 <그 남자네 집>을 읽었습니다. 그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누군가가 함께 읽었으면 하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마침 명절이 다가왔고, 숙모라면 이 소설을 함께 읽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할머니댁 에 내려가기 전에 한 권을 구입했어요. 그리고는 책의 앞 부분에 뭐라고 작게 끄적거렸던 기억도 있어요. 읽고 너무 좋아서 숙모 생각이 났다느니, 항상 고맙다느니 그런 식의 짧은 편지였을 거예요. 그리고는 잠이 들려고 하는 숙모 곁에 마치 고백을 하는 소녀처럼 떨리는 손으로 놓고 나가려는데, 잠에서 깬 숙모가 뭐냐고 물으셨어요. 저는 그냥 선물이예요,라며 고백 뒤 대답을 듣지도 않고 도망가는 소년처럼 방문을 닫고 냉큼 나와버렸어요. 숙모가 그 책을 읽으셨는지, 읽지 않으셨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책 한 줄 읽기에도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시니까 아직 읽지 못하셨다 해도 섭섭한 마음은 없어요. 책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요. 당장 읽지 않아도 사 두면 언젠가 읽게 되는. 그러니 숙모도 언젠가 읽으실테니, 그리고 그 책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씹는 맛이 우러날테니 걱정하지 않아요. 그 때 저는 노년의 한 여자가 젊은 날의 반짝반짝 빛났던 첫사랑을 추억하는 그 이야기를 엄마 또래의 누군가에게 읽어드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당신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지 않았냐구요. 그 날들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구요.

       그리고 <친절한 복희씨>를 읽었습니다. 9년만에 낸 소설집이라는데, 목록에 '그 남자네 집'이 있는 거예요. 단편소설이었지만 내용은 같았어요. 알고보니 단편으로 먼저 발표를 하셨고, 긴 호흡으로 쓰고 싶어서 같은 내용으로 장편을 다시 내신 거더라구요. 저는 반대로 읽었지만요. 그래서 <그 남자네 집>을 읽었던 몇 해 전 생각이 났지요. 저는 그 시절 늘 책을 사면 제일 앞 장의 귀퉁이에다가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하는 심정에 대해서 짧게 끄적거려 놓곤 했어요. 너를 그리워하며 읽는다든지, 이 책의 이야기들이 너를 잊게 해줄 거라 믿는다든지. 그러고보니 책 앞에 메모를 남기던 버릇은 뭔가에 강하게 의지하고 매달리고 싶었던 그 때에 소유했던 습관이예요. 지금은 그러지 않거든요. 늘 이 이야기들이 나를 깊은 아픔에서 꺼내줄 거라고 바랬었고 믿었던 것 같아요. 그 시절에는 시도 아주 열심히 읽었거든요. <그 남자네 집>도 저를 따스하게 위로해주었죠.

       제 곁의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겠어요?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노년의 즐거움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이중성을 누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주겠어요? 때때로 젊음을 질투한다는 것에 대해. 내 엄마의 어머니에 대해. 늙어 기억을 잃어간다는 서글픔에 대해. 주름진 남편의 항문을 구석구석 닦아내는 시간들에 대해. 나이를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행복한 어떤 순간에 대해. 이렇게 살아온 것이 너무나 서러워 확 죽어버리고 싶은 어떤 날에 대해. 누가 이렇게 생생하게 직접 겪은 듯 솔직하게 무릎 앞에 나를 앉혀놓고 직접 말하듯 누가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주겠어요? 어떤 대목들은 지금도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 나도 분명히 나이들면 그럴거야, 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어떤 대목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아 내가 나이가 들면 이렇게 생각하게 될까, 너무 보수적인 시각 아닌가, 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해요. 그러다보면 어느새 늙어가고 있는 나의 엄마와 할머니를 떠올리게 되구요. 우린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들이라 그런 세밀한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거든요. 하지만 언젠가 엄마와 할머니와 마주앉아 맥주 한 병을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볼이 바알개진 엄마가, 혹은 할머니가 이런 고백들을 소녀처럼, 소년처럼 해 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시간들을 좀 더 많이, 오래 가지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두요.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는 다시 마당이 있는 집을 꿈꿉니다. 저는 나이도 그렇게 많지 않은데 아파트보다 마당이 있는 집이 더 부러워요. 편리한 아파트보다 마당이 있는 주택은 불편한 점도 많겠지만, 제겐 그것이 줄 기쁨이 더 눈에 보여요. 마당 한 귀퉁이에 여러가지 채소를 가꾸고 커다란 평상 위에서 대접 위에 보리밥 얹고, 간을 알맞게 한 나물을 섞고, 차가운 물에 헹군 채소를 손으로 뜯어서 넣고, 고소한 참기름에 빠알간 고추장을 쓱쓱 넣고 비벼서 우걱우걱 한 숟가락을 입에 넣으면 입 안 가득 느껴지는 행복감에 대한 상상. 좋은 친구 한 사람 정도를 불러서 평상 위에 나란히 누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파란 하늘에 따스한 햇살이 배 위로 겹겹이 쌓이고 동네 어귀에서 들리는 복작복작하고도 일상적인 소리들이 저절로 배경음악이 되어 아,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나이가 많이 든 후, 언젠가 행복할 상상을 하면서 책을 덮습니다. 상상만으로도 배가 기분좋게 불러옵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