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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색, 계 - 뱀처럼 당신을 파고 들거예요
    극장에가다 2007. 11. 10. 19:08

        이안 감독의 전작 <브로크백 마운틴>만큼은 아니였어요. 격정적인 사랑의 절절함을 기대하고 갔었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브로크백 마운틴>이 사랑의 격정을 더 절절하게 표현했어요.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동성과의 긴 시간을 두고 이어지고 끊어지는 사랑이였잖아요.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의 음악이 더 시려 마음을 추스렸었는데, 이안 감독의 신작 <색, 계>는 <브로크백 마운틴>보다 육체 관계에 있어서는 격정적이였지만 마음, 감성에 있어서는 절절해지는 순간 딱 끊거든요. 그래서 뭔가 아쉽고 안타깝고 이 이야기가 더 계속 되었으면 했어요. 양조위가 어루만지는 침대 위에서 일어나 막 부인, 아니 치아즈가 사라진 곳에서 한 방울 눈물을 흘려주었으면. 결국 가지지 못한 다이아 반지를 차가운 손가락 위에라도 끼워주었으면. 제멋대로 다음 이야기를 머릿 속으로 이어나가봤어요. 그 후에도 여전히 아무도 믿지 못하고 경계하게 되는 차가운 '이'의 모습을 상상하면서요.

       저는 <색, 계>를 보면서 물론 훌륭한 양조위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처음 보는 배우 탕웨이에게 완전히 빠져버렸어요. 뭐랄까. 참 동양적인 얼굴이예요. 서양인형처럼 예쁘지 않지만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매력들이 넘쳐나요. 영화 속에서 그녀는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조국을 위하는 순수한 대학생의 왕 치아즈와 목숨을 걸고 요염하게 친일파를 유혹하는 막부인의 얼굴이요. 치아즈는 화장기가 없는 생머리에 단아하고 막부인은 컵에 새빨간 자국을 남기는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올림머리를 하고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이'를 유혹해요. 탕웨이는 이 두 얼굴을 정말 잘 소화해냈어요. 청순함과 섹시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얼굴과 표정을 가지고 있었어요.


       양조위야 말할 것도 없죠. 이번 역할로 정신분열증에 걸릴 뻔 했다고 하던데, 정말 이 영화는 제가 평소 양조위에게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달랐어요. 부인도 부하도 믿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어야만 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 늘 사람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죽이고 언제 자신도 반대세력에게 암살 당할지 몰라 어떤 움직임에도 민감한 사람. 영화 속 양조위는 너무 지쳐보였고, 무서워 보였고, 나이 들어 보였어요.

       영화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막부인이 자신의 5년 전, 치아즈였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시작해요. 그런 일 있잖아요. 지금 내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건 예전에 어떤 작은 행동 하나에서 시작된 것 같이 느껴지는. 막부인이 스파이가 된 것도, 그 남자를 왠지 사랑하게 되어버렸다는 마음이 들게 된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를 죽이는 일을 지금 해야 되는 것도, 어쩌면 5년 전 연극을 마치고 친구들과 다같이 거하게 취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비가 살포시 내리는 촉촉한 2층 버스에서 친구가 건넨 담배를 결국 한 입 물게 된 그것때문이 아닌가 하는.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서글픈 OST를 들으며 새빨간 립스틱의 막부인 스틸을 바라보고 있자니 2층 버스에서 얼굴과 팔을 살포시 내밀며 비를 맞던 화장기없이 순수했던 치아즈가 자꾸 생각이 나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지만, 예전 그 시절과 너무 다른 모습이 되어버렸지만, 그 때가 너무나 그리운. 마지막 장면에서 그 친구들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함께였던 치아즈가 떠올렸던 장면은 그 장면이 아니였을까 하는. 

       <색, 계>는 2차 세계대전이며 친일파며 스파이니 하는 배경보다 사람이 중요한, 마음이 중요한 영화예요. 치아즈가 그러잖아요. 빨리 서두르라고. 이러다가 자기 마음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사로잡혀 버릴 것만 같다고. 뱀처럼 그 사람이 마음을 파고 든다고. 결국 그렇게 되었죠. 치아즈도 모르는 사이, 막부인도 모르는 사이, '이'도 모르는 사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어요. 아, 영화볼 때는 괜찮았는데 이제서야 마음이 쿡쿡 시려오네요. 나도 모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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