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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스 - 남자와 여자가 노래할 때
    극장에가다 2007. 10. 2. 01:23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요.)


       남자가 스크린 앞에 섭니다. 어째선지 모르지만 상처난 기타를 메고 빈 케이스를 앞에 두었어요. 그리고 어쿠스틱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합니다. 멜로디는 슬퍼요. 가사는 더 애절하구요. 슬픈 사랑의 종말을 노래하는 남자의 표정은 내 마음 속 언젠가의 기억을 울컥 떠올리게 합니다. 나는 그의 빈 케이스에 칠천원을 넣어주었지만, 어쩐지 액수가 너무 적은 거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자는 두시간 내내 노래 했거든요. 두시간 내내 내 마음을 울렸거든요. 오늘 밤은 남자가 불러주었던 멜로디가 머리속을 떠나지 않을 것 같네요. 따라라라 따라라라.

       여자가 그 남자 앞에 섭니다. 노래하는 남자에게 말을 걸더니 다음 날에 애완동물처럼 진공청소기를 질질 끌고 옵니다. 남자는 청소기 수리공이거든요. 거리의 악사이기도 하지만요. 진공청소기를 아끼는 애완견인양 하루종일 끌고 다녔던 그 날, 아무래도 남자는 여자에게 빠져버렸던 거 같애요. 여자가 진공청소기를 옆에 제쳐두고 피아노를 연주했거든요. 여자의 피아노 소리도 경쾌하지는 않았어요. 구슬프고 애절한 멜로디였어요. 그래서 남자는 단번에 사랑에 빠졌을까요? 두 사람이 함께 연주를 시작했던 첫 멜로디가 정말 지금도 생생해요.

       어쩌면 연애라는 거 있잖아요. 아니, 연애라기 보다는 사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거 같은데. 어쩌면 사랑이라는 거 있잖아요. 그 남자와 여자의 첫번째 연주처럼 그렇게 한 사람이 기타를 먼저 치기 시작하면서 코드를 알려주고, 한 사람이 유심히 듣고 있다 그 연주를 서투르게 피아노로 따라가다가, 결국 어떤 너와 나, 우리의 교감이 생기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두 개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어요.

       오늘 읽은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소통과 단절에 대한. 너를 잃고 내가 마음이 찢어지게 아픈 이유는 이제 더 이상 너와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가장 가깝게 소통했던 사람과 이제는 소통할 수가 없어진거예요. 그래서 그애가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이유도, 우리가 사랑에 빠졌던 이유도, 그 때 니가 그렇게 말한 이유도 더 이상 알수 없고 상상과 추측과 절망만 할 뿐이죠. 더 이상 소통이 없으니 단절과 함께 고통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원스>의 남자와 여자는 음악으로, 피아노와 기타로, 높고 낮은 화음으로 소통하기 시작한 거죠. 두 사람의 화음이 음악을 만든 이후로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진 거예요.

       그렇지만 두 사람에게 음악이라는 공통분모 말고도 다른 닮은꼴이 있었죠. 사랑으로 아팠던 기억이예요. 고통스러웠던 순간들. 물론 그 순간을 음악이 치유해주긴 했지만, 물로 씻은 듯 깔끔하게 사라질 수가 없는 종류의 것들이잖아요. 헤어짐의 아픔이요.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될 수 있는 한 거리를 두려고 했던 거 같애요. 은행 대출을 받거나 녹음실을 빌리는데 더할 나위없이 쾌활하고 명랑한 그녀였지만, 사랑에 관해서만은 다시 한번 더 용기를 낼 수 없었던 거 같애요. 사실 그녀는 명랑하고 당당해보이지만 플레이어 배터리가 없어서 한 밤중에 거리로 나가 노래를 읊조리며 거리를 걷던 그 때의 가사처럼, 그 때의 표정처럼 한 켠에 어둡고 우울한 면이 있었거든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애기엄마인 것처럼요.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서 '밀루유 떼베'의 뜻을 찾아보고 가슴이 저려왔어요. 그 뜻을 보는 순간 두 사람이 함께 부르던 '그들의 송'의 첫 멜로디가 단번에 배경음악처럼 머릿속에 흘러나왔어요.

    - “그를 사랑해?”를 체코어로 뭐라고 해?
    - “밀루 예쉬 호?”
    - 그럼… 미루 예셔?
    - “밀루유 떼베”

       밀루유 떼베가 나는 너를 사랑해라니요. 햐. 어찌되었든 사랑에 빠진 것이 틀림없는 두 사람은 영화 속에서 키스 한번 나누지도 않았어요. 어설픈, 후회할 만한 불장난일 게 뻔하다는 여자의 말은 너무나 현실적이지만 너무나 정확한 말인 것 같아요. 두 사람이 불장난같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남자의 여자처럼 다른 사람이 생기거나, 여자의 남자처럼 소통이 되지 않는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눈에 안 봐도 뻔하잖아요. 열정이 빠진 사랑의 뒷모습은 애써 부인하고 싶지만, 믿고 싶지 않지만 지루하고 따분하고 아파요. 이제 두 사람은 서로를 생각할 때 아프지 않고 미소지으면서 그 날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을테니까 다행이예요. 살다보면 입 한번 마주치지 않았지만 마음의 온기로 가득했던 어떤 날들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한 사람쯤 가지고 싶잖아요. 정말 다행이예요.

       남자는 여자에게 피아노를, 여자는 남자에게 그의 1집을 선물해준 셈이네요. 이번 가을에 정말 잘 어울리는 영화. 짧은 이 가을이 지나가기 전에 당신이 놓치지 말아야 할 영화로 강추합니다. 피아노 소리와 기타 소리가, 그와 그녀가, 우리와 영화가 너무나 잘 어울리기 때문에. 아, 가사들이 정말 좋아요. 영화는 현재를 노래하고 있지만, 그들의 가사는 그들의 과거를 노래하고 있거든요. 과거 없는 현재가 없듯, 그와 그녀의 가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들이 이해가 되요. 말하지 않아도. 아, 두 배우가 영화가 끝나고 실제로 사랑에 빠졌다고 하니 정말 뒷이야기도 이렇게 달콤하다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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