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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진 - 신경숙 작가님께
    서재를쌓다 2007. 9. 6. 12:04

         


    신경숙 작가님께.

       대학교 3학년때였던 거 같아요. 국문과에서 신경숙 작가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벽보를 보고는 그 날을 기억해뒀다가 강의실에 들어가 앉아 있었죠. 그 날은 친구들이 모두 다 약속이 있어서 혼자 우두커니 국문과 학생들로 꽉 찬 강의실에 앉아 있는데,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작가님이 도착하시질 않으셨어요. 과대표가 지금 오시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고서도 한참이였죠. 그 날의 기억이 또렷하다면 그 강의실에 있던 백여명의 학생들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어요. 그리고 작가님이 허겁지겁 들어오셨죠. 자리에 앉으시자마자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며 연거푸 사과를 하셨죠. 제게 휴대폰이 하나 있는데, 그 휴대폰을 거의 안 써요. 받지를 않고 걸때만 가끔씩 쓰는데, 로 시작하는 말씀이었던 거 같아요. 건망증이 너무 심하다고 하시면서 다이어리에 오늘 약속을 꾹꾹 눌러 써 놓았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까맣게 잊어버리고 집 앞에 온 손님과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원래 휴대폰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를 않는데 계속 걸려오는 전화를 오늘은 받았다고. 그리고 아차, 싶었다고. 그 걸음에 달려와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씀하셨어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해요. 강연회치고는 좀 특이했잖아요. 그 날 아끼고 아끼는 <깊은 슬픔>을 들고가서 제일 앞 장에 사인을 받았죠. 너무나 좋았어요. 좋아하는 책에 좋아하는 작가님이 직접 새겨준 내 이름이 담긴 사인이라니.

       작가님의 책을 처음 본 건 대학교 1학년때였어요. 작가님의 책을 정말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를 대학 들어와서 만났는데, 그 친구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었죠. <깊은 슬픔>말이예요. 그 친구는 <깊은 슬픔>을 고등학교 때 읽었는데, 책을 그냥 덮어버릴 수가 없어서 수업시간에 책상 밑으로 펴놓고 야금야금 읽어나갔다고 했어요. 그리고 며칠을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지냈다고 했어요. 사실 그 친구가 그 때 <깊은 슬픔>의 은서를 닮았던 거 같아요. 여렸고, 언제든 부서져버릴 것같은 감정을 언뜻언뜻 보였거든요. 그 때 나는 그 친구가 어느샌가 말도 없이 도망가 버릴 것만 같아서 항상 불안했던 거 같아요. 학교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다가도,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도 그 친구가 '나, 갈래.'라면서 일어나 저만치 가버리고는 다시는 안 와 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런 감정들이 너무 두려웠던 스무 살이었어요.

       그리고 <깊은 슬픔>을 읽고 아득했지요. 좋은 구절들을 다이어리에 고대로 베껴쓰면서 나는 은서가 부러웠어요. 그 나이에는 응당 그러잖아요. 여리고 여린 은서를 닮고 싶었죠. 그녀에게 완과 세가 있는 게 질투가 났죠. 왜 세를 사랑하지 않고 완을 사랑하는지, 세를 사랑한 뒤엔 왜 세가 그녀를 보질 않는지 알 수 없고 아득한 마음뿐이었어요. 나는 친구의 고등학교 시절, 그 때처럼 아득해지려고 노력했던 거 같아요. 며칠을 아무 것도 못하는 상태라니. 그 친구와 똑같은 감정의 깊이를 가지고 싶었어요. <깊은 슬픔>을 읽고 나서 말이예요.

       그런데 제가 정말 작가님의 글을 읽고 아득해졌던 건 <외딴방>을 읽고 난 후였어요. <깊은 슬픔>을 읽고 작가님의 글들을 도서관에서 찾아서 읽었는데, <외딴방>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저렸어요. 아팠고 아득했어요. 읽는 내내 마음이 욱신거려서 자꾸만 책장을 덮었죠. 덮었다 펴서 읽고, 또 덮었다 펴서 읽었어요. 그리고 며칠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어요. 자꾸만 책 속의 글귀들이 생각이 났어요. 구더기가 바글거렸던 언니가 골방에서 죽었던 것, 옥상에서의 놀이. 좋은 구절들이 정말 많았지만, 한 문장도 다이어리에 베껴 적을 수 없었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이올렛>을 읽었어요. 사실 <바이올렛>은 끝까지 읽지를 못했어요. 아직까지도. 책을 서점에서 샀었는데, 그 책을 끝까지 읽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기도 버거웠어요. 자꾸만 마음을 가라앉히는 글들을 읽어내려갈 수가 없었어요. 나는 스무살 때보다 좀 더 밖으로 나가고 싶었어요. 다 읽지 못한 책은 아는 언니에게 선물을 했어요. 빌려줬었던 건지, 선물을 한건지 기억이 또렷하지 않은데 책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니 선물을 한 거 였던 거 같아요. <바이올렛>을 다 읽지 못하면서 나는 이제 한동안 작가님의 책을 읽지 않겠다 다짐했어요. <깊은 슬픔>을 닮은 제 친구도 작가님의 글들이 이제 마음을 버겁게 한다고 했어요. 아, 그 친구는 이제 <깊은 슬픔>의 은서를 닮지 않았어요. 그 친구와 나는 둘이서 무슨 다짐이라도 한 것처럼 작가의 책을 찾아서 읽지 않게 되었어요. 물론 작가님이 그 뒤로 장편소설을 발표하지 않으신 이유도 있지만요. 아, 그 친구가 <바이올렛>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한번 물어봐야겠어요.
       
       그리고 <리진>이군요. 작가님의 말씀대로 저도 작가님과 역사소설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리진>을 읽게 된다면 출간되고 아주 오랜 후일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매번 도서관에서 대출 중이던 책이 어쩌다 제 손 안에 들어왔어요. 꽤 많은 사람의 손을 타 벌써 손때가 많이 묻은 책 <리진>을 그렇게 읽게 되었어요. 두권을 단숨에 읽어내려갔어요. 그리고 친구가 <깊은 슬픔>을 읽었던 그 때처럼, 제가 <외딴방>을 읽었던 그 때처럼, 저는 또 아득해져버렸어요.

       책을 읽기 전에 KBS에서 해준 역사스페셜 형식의 리진 편을 본 적이 있어요. 재연을 한 리진역의 배우가 파리에서 외국인들에 둘러싸여 시선을 떨어뜨린 채 쓸쓸한 얼굴로 앉아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왕의 여자가 프랑스 외교관과 함께 파리로 떠났지만, 그 프랑스 외교관의 남아있는 여러 기록들 중에서 조선의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것이나 그에 관련된 기록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수집한 조선과 동양의 물건들이 조그만 박물관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영상들을 보았지요.

       작가노트에 작가님이 그렇게 쓰셨죠? 작가님이 하신 건 리진을 아기나인의 신분으로 궁궐에 들여보낸 것까지만인 것 같다고. 그 뒤로 리진은 제 스스로 소설 속의 리진으로 움직였다고. 저도요. 저도 그랬어요. 리진이 어릴 때 궁궐을 들락날락한 뒤로 책을 읽고 있는 제 옆에 가만히 앉아서 함께 이 책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어여쁘고 가련한 여인이 옆에서 불어를 노래하기도 하고, 팔을 곱게 뻗어 춤을 추는 동작을 하기도 하고, 어느 구절에서는 책을 읽고 있는 저를 빤히 들여다보기도 했어요. 그리고 파리에서의 리진은 가만히 제 옆에 앉아 티비의 재연영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시선을 떨어뜨린 채 쓸쓸한 얼굴로 저를 보아주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지요.

       제 마음이 아득해진 건 주로 왕비와 함께 있는 리진을 볼 때였어요. 콜랭과의 사랑이 끝났을 때보다 왕비의 고립무원 마음을 마주했을 때의 리진, 왕비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했을 때의 리진의 마음이었죠. 콜랭의 <레미제라블> 속 향낭과 같은 사랑보다 왕비의 속이 새하얀 배를 숟가락을 퍼 먹여주는 사랑에 더 마음이 갔어요. 그래도 콜랭이 리진에게 보낸 마지막 서신과 리진이 보낸 마지막 서신을 찢어 없애버린 콜랭의 마음은 이해하기야 하지만 결국 그는 타인이었다는 씁쓸한 마음을 저버릴 수가 없네요. 정녕 남녀간의 사랑이란 그리 허망한 것일까요? 홍종우의 사랑도 그랬듯이요.

       작가님. 이 말도 안되게 길기만 한 편지글에 그저 감사하다는 마음을 보냅니다. 사실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시작한 글이었는데, 괜한 말들로 이렇게 길어져 버렸네요. 어제 비가 내렸고, 저는 달거리를 시작했어요. 아랫배가 시큰거리게 아프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책장을 마쳤습니다. 집 앞 도서관의 큰 책상 앞에 앉아서 읽었는데, 시간이 다 되어서 그런지 늘 꽉 찼던 도서관에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작가노트는 집에 가서 읽을 요량으로 남겨두고 책을 덮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왕비가 시해당할 때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는데, 콜랭의 에필로그까지 읽으니 참을 수가 있어야죠. 밑으로 내려가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꺼내 마시면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양을 보고 있었어요. 순간 아득해지는 마음이 편안해지더니 행복해지더라구요. 작가님께 고맙다는 생각뿐이었죠. 리진은 정말 작가님의 몸에 꼭 맞은 옷이었어요. 저는 비록 허구이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리진을, 작가님의 리진으로 기억할래요. 김탁환 작가님의 <리심>도 언젠가 읽어보고 싶지만, 리진은 작가님과 더 닮아있을 것 같아요.

        조금 더 일찍 <리진>을 읽었으면 출간 후에 있었던 여러가지 행사에 참석해서 <리진>의 첫 장에도 제 이름이 새겨진 작가님의 사인을 받을 수 있었을텐데요. 그래도 가을이 오는, 이 쓸쓸해지는 계절을 맞이하는 이 즈음이 제게는 더할나위없이 리진을 읽기에 좋았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 만나게 되면 <리진>의 앞 장에도 사인 부탁드릴께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반납하고, 제 책으로 사서 두려구요. 지내다 리진이 보고 싶어질 때면 책장에서 꺼내서 읽으려구요. <깊은 슬픔>을 한번 꺼내서 읽기가 왠지 망설여지는데, <리진>은 그렇지 않을 거 같아요.

        그럼 작가님의 사인 앞 글귀처럼
        작가님, 좋은 일 많으세요.

    2007년 9월 6일
    작가님의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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