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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비를 기르다 - 고독하기 때문에 읽는다
    서재를쌓다 2007. 9. 1. 16:38
    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내게는 소설보다도 작가의 말을 더 기다리게 만드는 작가가 있다. 아마 <은어낚시통신>을 읽었을 때였을 거다. 은어가 강물로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작가의 말이 있었다. 세세한 구절들이 떠오르진 않지만, 나는 한 장 남짓의 소설가의 시같은 작가의 말을 읽고는 책을 그냥 덮어버리지 못하고 그 구절들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그 뒤로 윤대녕의 예의 그 감성적인 글의 촉감들도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어떤 작가의 말을 남겼을까 기대하면서 읽게 된다. 그리고 소설을 끝나기 전에는 절대 뒤로 넘겨 먼저 읽지 않는다. 작가의 말은 소설이 끝난 다음에 읽는 것이 가장 빛나므로.

       사실 이러면서도 그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내가 읽은 그의 글들은 <은어낚시통신>, <눈의 여행자>, 그리고 약간의 실망을 금치 못했던 <열두명의 연인들>과 이번에 읽은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이다. 윤대녕은 적어도 내게는 그냥 마구잡이로 손이 가서 읽기 시작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의 글을 읽기 위해서는 조금은 별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가을이 오거나, 겨울이 한창인 어느 날에 읽거나 마음이 서늘하거나 누군가 내 어깨를 보듬아주는 꿈을 꾸고 싶은 깊은 밤에 읽는 것이 좋다. 지나치게 행복하거나 불행한 순간보다는 적당히 쓸쓸하고 스산한 마음이 드는 날 그의 글에 손이 가고 마음이 간다.

       이번 소설집도 계절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웠던 여름이었지만, 마음은 스산했던 그런 날에 읽었다.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을 나는 돌아오지 않는 제비를 기다리는 소슬한 마음으로 읽었다. 어쩌면 돌아왔으나 너무나 세월이 흘러버려 그의 모습이 맞는가 헤아려보는 모습이 안타까워 촉촉해지는 마음으로 읽었다. 시간은 늘 흐르고, 우리는 늘 돌아오지 않을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위로받고 살아가지 않는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에는 돌아올 거라고 믿는 가혹한 희망으로.

       '연'의 정연은 해운을 기다린다. 해운이 미선과 함께 멀리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그가 다시 돌아와줄까하는 바램을 숨기지 못하고. 나는 '연'을 읽으면서 결국 정연은 해운을 마음 속에서 지웠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소설 속 '나'는 정연을 세월이 흐르고 다시 만나도 여전히 해운을 그리워하는 정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연을 통해서 해운을 생각한다. 하늘 위에 무수하게 띄운 연처럼 우리의 기억들과 인연들은 가느다란 실 한가락으로 이어져있고 끊어지기도 하고 얽혀 버리는 것이라고. 마지막 눈이 내리는 겨울 하늘의 연을 읽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제비를 기르다'는 제비가 강남으로 떠나듯 항상 집을 나가서 어딘가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던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부재를 그리워했던 내가 있다. 나는 주인공이 늘 두 명의 문희, 아니 세 명의 문희를 그리워했지만, 정작 그가 그리워한 건 유년기 시절 그가 느낄 수 없었던 어머니의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자신의 역마끼를 억제하지 못해 바깥으로 떠돌았지만 평생 남아있는 남자들의 아픔과 외로움을 생각하지 못한 어머니. 어머니가 외로웠기에 아버지도 외로웠고 '나'도 지독하게 외로웠던 것이다. 마지막, 문희의 선술집에서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던 '나'는 유년기의 '나'인 것이다. 그 때 외롭다고 고독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울지 못했던 '내'가 이렇게 나이가 많이 든 후에야 폭발한 것이라고. '나'는 여전히 외롭다고.

       '탱자'를 읽으면서 나는 계속 잔물결이 치는 통통배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어떤 때는 말할 수 없이 잔잔하고, 어떨 때는 금방 배가 뒤집힐 것만 같은 강한 파도에 휩싸이는 바다 위에서 고모가 말하는 거다. 내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인생이 이런 거더라. '탱자'속의 고모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이를테면 '귤이 탱자가 되는 날, 돌아오겠소' 라는 따위는 무의미하고 기약없는 배신을 당했다. 결국 마음 줄 곳도, 늙은 육신 하나 추스릴 곳 없이 쓸쓸히 인생은 마감한다. 인생은 이런 거더구나.

       이번 소설집에서 누군가의 부재가 많았다. '제비를 기르다'에서는 어머니의 부재, '편백나무숲 쪽으로'에서는 아버지의 부재, '고래등'에서도 엄연한 아버지의 부재였다. 그리고 '낙타 주머니'에서도 동료의 부재로 끝난다. 그 부재로 인해 빈 자리가 생기고, 그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소설은 고독하고 쓸쓸해진다. 특히 '낙타 주머니'에서 죽은 동료가 참을 수 없이 그리워지던 어느 날, 그의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하늘나라의 동료에게 전하는 말들을 쏟아내는 주인공이나 그 메세지를 고스란히 듣고 있는 동생의 마음이란 우리는 고독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 살고 있지만, 내 떨리는 어깨를 보듬아줄 사람 한 명쯤은 이 세상에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소설 속 '나'에 실제의 나 자신을 대입시켜본다. 지독하게 그립고 외로운 존재인 '나'에 나를 집어 넣고나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고독한 우리가 된다. 얼마나 나이가 들어야 우리는 고독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나 그의 글들을 읽어야 고독하지 않은 그의 글을 읽을 수 있을까. 이번 <제비를 기르다>의 작가의 말처럼. 그도 그립기 때문에 글을 써 나가고 있고, 우리도 무언가가 그립기 때문에 그의 글을 끊임없이 읽고 있다. 지금은 출렁이는 통통배 위지만 언젠가 그게 육지든 섬이든 하늘이든 어디든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그리움으로 우리도 작가도 살아가는 것이라고 작가의 말을 덮으면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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