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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비
    모퉁이다방 2021. 11. 8. 14:19

     

     

       비가 오니 예전에 살던 동네 생각이 난다. 11층이었던 오피스텔 앞문으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넌다. 바로 펼쳐지는 불광천 길. 오른편에 천을 두고 왼편으로는 자전거 길을 두고 천천히 걷는다. 큰 나무들에 노란색, 빨간색 단풍잎들이 그득하다. 기지개도 펴보고 숨을 힘껏 들이마시면서 이어폰을 꺼내 걷는다. 첫 곡은 루시드폴의 '아직, 있다'가 좋겠다. 걷다보면 이름모를 제법 커다란 새가 물 아래로 부리를 들이미는 모습도 보이고 나뭇잎들이 가을바람에 일제히 사르르 움직이는 모습도 보인다. 그렇게 삼십분 넘게 걷다 월드컵경기장 쪽 계단을 올라 극장에 간다. 찜해뒀던 영화 시간표를 다시 확인하고 무인발권기에서 티켓을 끊는다. 저녁이면 맥주 한 잔을 했을테지만 오전시간이니 따뜻한 커피를 주문한다. 날씨가 쌀쌀하니 라테가 좋겠다. 입장 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가지고 간 책을 에코백에서 꺼낸다. 사람도 없고 한적하니 책이 잘 읽힌다. 입장 시간이 가까워지고 화장실을 다녀온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 사람이 별로 없는 극장에서 집중해서 영화를 본다. 영화는 좋다. 시간을 내어, 일부러 걸어, 영화를 보러오길 잘했다고 생각이 든다. 극장을 나와 불광천으로 내려가기 전 다리 위에서 인증샷을 찍는다. 티켓을 꺼내 날짜와 좌석번호, 영화제목과 시간이 보이도록. 그리고 이 곳의 커다란 나무들이 나오도록. 이어폰을 다시 꺼내 방금 본 영화의 분위기와 비슷한 음악을 검색한 뒤 들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코끝에 닿는 바람이 쌀쌀한 것이 딱 내가 좋아하는 날씨다 생각하면서.

     

       엄마가 고구마를 보내면서 가지를 여러 개 함께 담아 보내주셔서 어쩌나 하다 검색을 해보니 이탈리아 가정식 음식으로 올리브오일가지절임이 있더라. 구운 가지를 마늘, 허브와 함께 올리브오일에 담아두고 빵 위에 올려먹거나 파스타를 만들어먹으면 맛있단다. 남은 오일은 파스타나 다른 요리 할 때 쓰면 맛나고. 집에 올리브오일이 있어 아이와 함께 유모차를 끌고 나가 마늘을 사왔다. 수퍼에 바질이 있었는데 너무 비싸 집에 있는 깻잎을 조금 넣자 싶었다. 페퍼론치노도 레시피에 있었는데 모유수유 중이라 아예 넣지 않을까 싶다가 약간 넣으면 맛있을 것 같아 세 개 정도만 잘게 부숴 넣었다. 집에 있는 자그마한 병을 세 개 꺼내 끓는 물에 소독했다. 후라이팬에 가지를 굽고 마늘을 굵게 으깨고 깻잎을 가늘게 잘랐다. 커다란 볼을 꺼내 모든 재료를 함께 버무렸다. 벌써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났다. 딱 세 개의 병에 담겼다. 작은 병 하나는 그 날 놀러온 민선이에게 줬다. 맛이 너무 궁금해 다음날 동네빵집에서 올리브가 박힌 치아바타와 말랑말랑한 바케트를 사왔다. 빵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그 위에 가지를 얹었다. 마늘향이 가득 밴 오일이 빵을 촉촉히 적셔줬다. 맛은 성공. 마늘을 너무 많이 넣어서 향이 강한데 다음번에는 마늘을 줄이고 향이 좋은 허브를 함께 넣어야겠다. 

     

       비가 왔다. 이 문장을 쓰고 창밖을 보니 다시 비가 오고 있네. 아까는 개었었는데. 이런 날이면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따뜻한 음료를 만들어 마시며 책을 읽거나 영화를 봤었는데. 다행이 아가가 자고 있어 몇 자 남긴다. 오늘은 꼭 무언가 쓰고 싶은 날이라. 집 앞 산에 단풍이 그득했는데 비와 바람 때문에 많이 지겠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산 덕분에 여름과 가을을 아가와 함께 집에서 잘 견딜 수 있었다. 고마워, 숲아. 여기까지 쓰니 아기가.... 울....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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