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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희망
    티비를보다 2021. 10. 8. 16:3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틀에 걸쳐 봤다. 아이와 단둘이 있을 때는 티비를 켜지 않는데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자고 있는 사이 틀었다가 깨어나도 끄질 못했다. (미안, 아가) 3살이 되어가는 딸이 있는 알렉스가 함께 사는 남자친구에게 학대를 당하고 그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라고 쓰고 사전에서 '고군분투'를 찾아봤다. 고군분투 : 적은 인원(人員)이나 약한 힘으로 남의 힘을 받지 아니하고, 힘에 벅찬 일을 극악스럽게 함. '극악스럽다'도 찾아봤다. 극악스럽다 : 더할 나위 없이 못되고 나쁜 구석이 있다. 극악스럽다는 표현을 제외하면 맞는 것 같다. 탈출은 단순히 도망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의 완벽한 독립이다. 알렉스는 한 번의 실수를 하지만 결국 해낸다. 그녀에게는 어릴 때 엄마를 학대했던 아빠가 있고, 허상에 빠져 삶을 잘 일구어나가지 못하는 엄마가 있다. 도움을 받을만한 가족이 없다. 정부에게서 받을 수 있는 지원 절차와 조건들도 힘이 든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딸이 있기 때문에. 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알렉스는 얼굴 가득 충만한 미소를 보인다.

     

      알렉스가 이 많은 상처와 고난을 치유해나가는 방법은 글쓰기이다. 카펫에 누워 실의에 빠져 있던 자신을 일으켜 세워준 친구는 한밤중에 말도 없이 떠났지만 그녀에게 노트와 펜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파출부의 고백. 이 제목 아래 자신이 생계를 위해 청소를 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몇년 전 포기했던 대학교에 재지원이 가능한지 물어본다. 학교는 최근에 쓴 글이 있냐고 묻고 그 글을 보내달라고 한다. 알렉스는 노트에 가득 썼던 이야기들을 타이핑해 전송을 한다. 결과는 합격. 본래의 글쓰기 능력과 그동안 겪은 출산과 육아, 학대와 시련의 나날들이 더해져 그의 글을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었을 거다. 알렉스에게 잘못이 있다면 제대로 된 남자와 사랑을 하지 못한 것. 다시 한번 시련이 찾아오지만 이번엔 출구를 잘 찾아나간다. 

     

      새로운 삶이 펼쳐질 도시로의 이사를 앞두고 알렉스는 지내던 쉼터에서 글쓰기 치유 교실을 맡는다.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글을 써보고 사람들 앞에서 그 글을 읽어보는 거다. 좋았던 장면은 발표가 끝나면 한 사람씩 방금 읽었던 글 중 좋았던 구절을 하나씩 이야기하는 거다. 쉼터를 관리하던 책임자도 글쓰기 교실에 참여했다. 그녀는 지옥같았던 시기에 9주된 딸이 자신을 만졌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글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미소를 띄며 좋았던 구절을 이야기한다. 여과되지 않은 애정. 따뜻한 젖을 주는 여자. 밤낮으로 두려워했던. 작은 손. 그리고 드라마의 제일 마지막 장면. 알렉스가 자신의 글을 읽는다. 이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알렉스의 글 전체를 읽을 수 있었다. 글은 "나의 가장 행복한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에서 "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은 네 것이라고."로 끝난다. 나는 잠시 이 글쓰기 교실의 일원이 되어 알렉스의 글 중 좋았던 구절을 읊어본다. 참 많았다. 오래된 참치 냄새가 나는. 내 놀라운 딸. 많은 행복한 날. 300개 하고도 38개의 변기 청소. 페리 선착장 바닥에서의 하룻밤. 내 딸 인생의 3번째 해 전부. M은 매디의 첫 글자. 완전히 새로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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