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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개를 베다
    서재를쌓다 2021. 9. 7. 00:32

     

     

     

    (...) 네번째로 자동차키를 잃어버린 날, 나는 자동차 바퀴를 걷어차며 화풀이를 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는데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실패를 한 적이 없어서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언니한테 가봐야겠어. 그제야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 62쪽, 날씨 이야기

     

    (...) "손바닥에 적은 그 단어 스펠링 틀렸어요." 여학생이 말했다. "i가 두 개여야 해요." 그는 한 달만 더 학원을 다녀보자고 결심했다. 이번에는 정말 버스에서 졸지 않겠다고. 학원에 갈 때 스무 개. 돌아올 때 스무 개. 보란듯 외우리라고. 결심대로 그는 정말 버스에서 졸지 않았다. 그러자 평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학원까지 가는 길에는 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얼마나 큰지 나무 그늘 아래 집 한 채는 지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 밑에 점이 있는 여자아이를 같은 버스에서 보았다. 그보다 세 정거장 먼저 내렸다. 늘 이어폰을 꽂고 있었는데 무얼 듣는지 혼자 피식 웃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그는 뭘 들어요? 하고 묻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여자아이의 뒷자리였다. 어쩌다 여자아이의 앞에 자리가 비어도 그는 앉지 않았다. 자신의 뒤통수만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무 그늘에 앉아 여자아이와 도시락을 나눠 먹는 꿈을 꾸었다. 어쩌다 여자아이가 버스에 없으면 그는 그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음에 오는 버스를 탔다. 그러면 어김없이 여자아이가 거기 앉아 있었다. 학력고사를 보고 나면 고백을 하리라. 그는 영어 단어를 외우고 또 외웠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난 뒤 버스에서 여자아이를 만났을 떄, 여자아이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머리를 잘랐는데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여자아이가 창밖을 내다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걸 보았다.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도 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더이상 설레지는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그는 여자아이가 버스에서 내리고 난 다음에야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알아차렸다. 눈 밑의 점. 그 점이 없어졌다. 점 하나 뺐을 뿐인데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수 있다니. 그는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

    - 143-144쪽, 팔 길이만큼의 세계

     

    (...) 아빠와 외할머니는 병원 앞 벤치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한잔 마셨다. 술을 마셔서인지, 딸이 태어나서인지, 비가 온 다음이어서인지, 그날 아빠의 눈에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구름은 하얀색으로 보였고, 하늘은 파란색으로 보였다. 노란색 우비를 입고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아이의 어깨 위에 단풍잎 하나가 붙어 있는 것도 보였다. 꼭 그림책을 오려놓은 것 같아요. 아빠가 말했다. 외할머니가 그러네, 하고 대꾸했다. 커피가 달아요, 아빠가 말했다. 외할머니가 그러네, 하고 대꾸했다. (...)

    - 169쪽, 낮술

     

     

      계절이 오고가는 것이 이렇게 선명하게 보일 수 있다니. <노포의 영업비밀> 통닭 영상을 보다 갑자기 통째로 튀긴 닭이 먹고 싶어졌다. 남편이 거래처 사람과 술을 한 잔 하고 들어온 뒤 앱으로 닭 한 마리를 주문을 했다. 통째로 튀긴 닭을 파는 닭집이다. 20분 안에 가지러 오라는 메시지가 왔다. 남편은 비가 그쳤다고 했는데 혹시나 싶어 우산을 가지고 나왔다. 비가 다시 쏟아지고 있었다. 이어폰을 꽂고 '선우정아'로 검색을 하고 음악을 재생시켰다.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그리운 사람은 늘어간다. 끊어진 연에 미련은 없더라도 그리운 마음은 막지 못해. 잘 지내니. 문득 떠오른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 우산을 펴고 걸어가는데 이제 정말 가을이구나 싶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조금 쓸쓸해졌다. 이런 날 쓸쓸해할 사람 생각을 했다.   

     

      친구가 아기 낮잠 잘 시간에 읽으라고 보내준 책을 천천히 읽었더랬다. 아기 재우고 얼마 못 읽고 자기도 하고, 아침에 반신욕을 하면서 읽기도 했다. 날씨 이야기, 팔 길이만큼의 세계, 낮술에 포스트잇을 붙여뒀다. 좋았던 부분을 옮겨 적다 보니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마음이 대단하게 변해버린 것에 내가 공감을 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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