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희 작가는 책을 한 권 한 권 읽다 신뢰하게 된 작가이다. 그래서 새 책이 나오면 무조건 사서 읽겠다고 다짐한 작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다이나믹한 여행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는데, 이제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 생활의 고단함, 그럼에도 괜찮은 삶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이번 책도 따끈따끈한 상태로 구입했다. 책와 영화에 대한 작가의 긴 추신글이다. 책도 읽는 사람의 기운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지 월요일부터 시작해 금요일에 끝냈는데, 월요일에는 무던하게 읽히다가 금요일이 되니 두근거리는 구절이 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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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마음속의 빛을 잃고 싶지 않아서, 영원히 청춘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어서, 나는 이런 이야기들로 내 마음의 이랑과 고랑을 가다듬는다. - 81쪽

 

   60대 나이에 동년배의 작가를 이토록 열렬히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건, 어쩌면 큰 용기가 아닐까? 심지어 그 작가와는 개인적인 친분조차 없는데도. 바로 그래서 나는 우치다 타츠루가 좋다. 좋아하는 마음은 씩씩하게 좋아한다고 표현하고, 왜 좋아하는지를 자신의 지성과 관점과 삶으로 풀어내는 자세가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좋아하는 마음조차 그의 고유한 개성과 자산이 되어버린다. 바람직한 팬이란 이런 것이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결국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 - 94쪽

 

   나는 폴과 그의 친구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나 역시 20대를 겪어냈다. 무언가 엄청난 것을 뚫고 지나온 느낌인데, 그것이 크게 자랑스럽지는 않다. 무엇을 뚫고 나왔는지 알 수 없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젊음의 느낌이겠지. - 102-103쪽

 

  결혼 후 10년쯤 지나니 이제야 서로 손잡을 여유가 생겼다. 누군가의 손을 잡을 때면, 그 사람이 내 손을 잡아줄 때면 사람은 겸손해진다. 곁에 누가 있어서 내 손을 잡아준다는 이 현실이 고맙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아서, 가끔 힘을 주어 꽉 쥐어주어서 고맙다.

   쇼코는 남편의 손이 좋다고 말했다. 딱히 눈에 띄지 않는 부위. 눈도 아니고 코도 아니고 입도 아닌 손. 나도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왜 노부부들이 어깨나 허리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손을 잡는지 알 것 같다. 열정이 사라진 후 남은 담백한 형태의 사랑은 손으로 전해진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 네 옆에 서서 네 손을 놓지 않겠다는 것. 계속 네 곁에 함께 있겠다는 것.

   그러니까 그것은 사랑이다. 열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따뜻하고도 단단한 그것은 분명,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의 무게는 10킬로그램이다. - 115쪽

 

   그 괴물은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기 전의 일요일 밤이면 모습을 드러낸다. 환한 옷가게의 거울 속에서 나를 지켜볼 때도 있다. 누군가를 질투할 때, 내 삶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나타난다. 이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는, 회오리바람 같은 의심에 휩싸일 때도 나타난다.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그것만 가진다면 내가 더 괜찮은 인간이 될 것 같다고 느낄 때, 사탕발림에 혹하고 비난에 좌절할 때 나타난다. 사는 게 버겁다고 느낄 때, 앞으로의 삶이 막막하다 느낄 때도 나타난다. 그 괴물은 충동구매나 과소비나 무절제나 방탕함의 이름을 하고 있다.

   나는 내게도 그놈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기회가 되면 그 놈 때문에 패가 망신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럴 뻔한 적도 있었다. 신용카드로 돌려막기를 해가며 옷과 구두를 사들이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갖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쉽게 미워했다. 커다란 여객선이 아니라 작은 파도에도 출렁이는 조각배를 탄 것처럼 살았다. 지금 나는 중간 크기의 여객선에 탄 것처럼 살고 있지만 실은 언제 조각배로 옮겨 탈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살고 있는 것뿐이다.

   어쩌면 나 역시 어느 날 리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 122-123쪽

 

   소개팅으로 만난 그 남자와 세 번째 데이트를 하던 날 극장에서 알렉산더 페인의 <사이드웨이>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나는 이 남자를 어떻게 떼어놓을지만 궁리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미 실패의 역사가 몇 번 있었다. 내 스타일인 남자들,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이 결국 나와 상극인 걸로 판명이 난 역사가. 그래서 나는 이 남자의 평범함과 단순함과 무딤을 세 번만 참아주기로 했다. 딱 세 번만.

   결국 나는 그 남자를 1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떼어놓지 못했다. 그 15년간 수없이 많은 위기가 있었다. 대부분은 내 성격 탓이었다. 사실 남자들과 사귈 때마다 불안정한 내 성격은 극에 달했다. 그들을 멋대로 휘두르려 하면서도 그들이 나를 떠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종종 지나치게 화를 냈고 그들의 사소한 결점을 하나하나 트집 잡으며 괴롭혔다. 그런 연애들은 늘 끝이 좋지 않았다. 남편 역시 나와 6개월쯤 사귀었을 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디 명상센터 같은 데라도 가봐.

   그러나 나를 구원한 것은 명상이 아니라 책이었다. 내게 도움이 된 책들은 여성 작가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 과거와의 힘겨운 결별, 새 출발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한 책이었다. 고통을 과장하고 스스로 동정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 여자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위안이 되었다. 아,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내가 괴물이 아니구나. 다들 자기 자신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살아가는구나. 그것만으로도 분노와 불안으로 날뛰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나 자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나이는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고백들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떨린다. - 157-158쪽

 

   내 안에는 굼뜨고 눈치 없고 모든 것에 미숙한 어린 여자애가 있다. 요즘도 그 여자애는 종종 외친다. '나는 이걸 할 수 없어!' '나는 이 인생을 도무지 살아낼 수가 없어!' 나는 그 여자애와 함께 달아나 버리고 싶다. 어딘가로 숨고 싶다. 술을 마시거나, 누군가에게 매달리거나, "아직 준비가 안 됐어."라고 변명하며 방문을 닫아걸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그 와중에도 나는 학교를 모두 졸업했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고, 직장에 들어갔고, 그 모든 전화를 걸어냈다는 사실을.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이나 낳아서 길렀다는 것을. 심지어 나에게는 내 인생이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내가 이 세상의 부적응자가 아니라는 표식이 되어주는 가족과 친구들과 동료들도 있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조금씩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다. 이제 나는 그 여자애를 다독일 줄 알게 되었다.

   '알아, 나도. 내가 무섭다는 걸. 하지만 지난번에도 해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할 수 있어. 처음엔 당황하고 무섭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늘 그랬던 것처럼.' - 165-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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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작가님이 SNS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 팔로우를 했다. 다행히 책의 느낌과 그 곳의 느낌이 같았다. 그렇지 않은 작가도 있었기에. 작가님은 안양에서 살다 얼마 전 동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비록 차이나타운 근방이긴 했지만 인천을 몇 시간 걸어온 경험이 내게 있다. 잠깐이지만 인천을 둘러보니 옛날의 멋을 현대의 것과 어울려 잘 보존한 느낌이어서 언젠가 인천에 숙소를 잡고 하루 둘러 보고 싶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런 인천에 작가님의 시선이 더해지니 더 근사하게 느껴졌다. 가족들과 달을 보며 산책하는 오르막 길도, 오래된 맛집들도, 걸어서 바다를 보러 갈 수 있는 점도. 동인천에서의 소소한 삶이 또 다른 좋은 책을 만들어줄 거라 기대하며 또 새 책을 기다려야지. 추신이 가득한 책을 읽고 혼자 있는 날에 조용히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을 봐야지 생각했고, 지금은 품절인 <인숙만필>을 중고책으로 주문해야지 생각했다. 좀더 많이 읽고 봐야지 라고도 생각했다. 아, 가을이 왔다.

 

 

  1. Luna 2020.10.31 10:4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한수희 작가님 참 좋아하는데,
    블로그를 검색하다 우연히 들어왔는데
    글들이 참 좋습니다.
    종종 들를께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