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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서재를쌓다 2020. 9. 27. 16:40

     

     

     

      마켓 컬리를 며칠동안 들어갔다 나왔다 장바구니에 담았다 뺐다 하다가 결국 주문했다. 내 생애 이렇게 비싼 치즈들을 그것도 다량으로 구매해 본 것은 처음이다.

     

      좋아하는 마음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억지로'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일은 어느샌가 개인의 역사가 되어 있곤 한다. '시간을 내서' 하지 않아도 그것에 자연스럽게 쌓인 시간은 어느새 책 한 권 분량이 되고도 넘친다.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도 없이, 이걸 이용해 뭔가를 하겠다는 야망도 없이, 그냥 좋은 것, 그저 끌리는 것.

      그것이 내겐 치즈다. 대단하지 않아도, 깊은 의미 같은 건 없어도 그저 좋아하는 세계가 있어서 나는 종종 스스로 부자라고 느낀다. 그렇게 좋아하는 마음을 좀 더 단단히 쥐어본다. 그렇게 내 삶을 조금 더 좋아하는 쪽으로 이끌어본다.

    - 10~11쪽

     

       최근에 와인을 두 번 과하게 마셨는데 처음에는 그 날 바로 뻗었고, 두번째에는 다음 날 머리가 아파 하루종일 혼났다. 물론 과하게 마신 탓이지만, 아직 와인의 맛을 잘 몰라서 그런가 아직까지는 벌컥벌컥 음료처럼 들이킬 수 있는 맥주가 내게 더 맞는 것 같다. 그렇지만 맥주와는 다른 그 찐-한 맛을 계속 알아가고 싶다. 치즈 하나로 책을 낼 정도의 김민철 씨처럼 동생은 커피와 와인을 아주 많이 사랑한다. 로스팅을 잘하는 지방의 커피집이 있다고 하면 주문을 해보고, SNS에 올려진 커피집 사장님의 남다른 커피사랑에 감탄하며 언젠가 그곳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한다. (동생은 커피와 전혀 관계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맛난 와인을 사기 위해서 강남을 왔다갔다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덕분에 동생이 그동안 고른 좋은 커피와 와인을 맛볼 수 있었다. 나는 진하고 강한 이탈리아 와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곡예사 언니는 생일에 최근에 맛난 와인을 맛보았다며 보내주었는데 이탈리와 와인이었다. 어쩜! 아직까지는 맥주를 더 사랑하지만 와인에게 부러운 것은 와인에게는 대개 오래된 역사가 있는 것. 어느 지역에서 재배되는지 땅의 역사가 있고, 재배하는 사람들, 가문의 역사가 있고, 얼마나 오래전의 것인지 빈티지의 역사가 있는 것. (맥주도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부럽고 근사하다. 이야기를 듣고 맛을 보면 더 근사하게 느껴진다. (<신의 물방울> 수준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최근에 와인을 과하게 마시고 뻗은 첫 날. 동생과 친구와 나는 랜선 술자리를 하기로 했다. 코로나가 극심했던 2.5단계의 시기라 대면하지 않고 술자리를 하기로 했다. 동생과 한번 한 적이 있는데 의외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고 분위기도 꽤 좋았더랬다. 그 날 친구는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에 있었고, 군포집에서는 초대받지 않은 한 사람이 불쑥 끼어들어 네 사람의 술자리가 되었다. 남편은 드디어 사직서를 냈다고 모두에게 이야기했고, 친구는 강원도의 숙소에 잔디가 있어 좋다고 말했다. 친구 아들은 신기해하며 엄마 옆에서 껌딱지 모드로 이모들과 레고 삼촌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동생은 동네 가게에서 육회를 포장해와 와인을 땄다. 나는 이 술자리를 생각하며 들어갔다 말았다 한 마켓컬리의 치즈들을 주문했는데 다른 안주를 먹느라 마지막에 느즈막히 치즈를 가져왔다. 김민철씨가 말한 것 처럼 치즈를 깎는 최고의 도구 감자칼로 깎았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터라 치즈의 맛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고 그냥 이 코로나의 밤이, 우리의 토요일 밤이, 다시 오지 않을 이 여름밤이 무르익는 것만이 느껴졌다. 그리고 화면에서 사라졌다. 남편이 일으켜 앉혔는데 웃으며 조금 앉아있다 다시 누워버려 작별의 인사를 하고 방안으로 끌려 들어간다고 한다. 정말 오래간만의 만취였다.

     

       치즈의 맛을 잘 모르는 나는 사놓은 치즈를 요리에 드문드문 넣고 있는데, 계란과 감자로 만든 프리타타에 넣었더니 향이 꼬리꼬리하고 맛이 더 풍성해졌다. 아직까지는 단독으로 먹는 것보다 곁들여 먹는 것이 더 맛난 것 같다. 책은 술술 잘 읽혔고, 나는 김민철 씨의 치즈처럼, 내게도 일생을 두고 좋아할 수 있는(좋아하고 있는), 그냥 좋고 그냥 끌리는 것,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부자라고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는가 생각해봤다. 아직 찾지 못했지만 분명히 있을 거다. 아마도. 오늘도 냉장고에서 치즈통을 꺼내 꼬리꼬리한 냄새를 맡으며 감자칼로 조금씩 깍아 맛을 음미해본다. 흠, 이것이 치즈의 맛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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