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선

from 서재를쌓다 2020. 8. 11. 22:27

 

   <하와이하다>를 구입했을 때 함께 온 사은품 달력을 8월로 넘기니 훌라춤을 추고 있다. 저자들과 고양이 한마리가. 그렇다면 8월은 훌라춤을 출만큼 신나는 달인 것인데, 올해는 비에 비에 비네. 종일 장마다. 1호선을 타며 제일 좋은 점은 내내 바깥이 보인다는 것. 겨울에는 출근길에는 해가 뜨기 전이라 퇴근길에는 해가 진 후라 어둠 뿐이었는데 여름이 시작되자 출근길도 퇴근길도 온통 밝고 푸르러졌다. 나뭇잎들이 여리여리한 연두빛이었다가 단단한 초록색으로 변하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느날 퇴근길에 한강다리를 건너는데 해가 마침 불그스레 지길래 영상을 찍어 엄마에게 보냈다. "멋있네~ 좋은 길로 다니네~" 메시지가 왔다. 바깥이 보여 제일 좋은 순간은 고개 숙여 책을 읽다 좋은 문장을 만나고 가슴이 벅차올라 고개를 들었을 때 좋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을 때. 감흥은 배가 된다.

 

  "....괜찮아지나요?"

  박 선생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민주의 책상 위에 차가 담긴 종이컵을 다시 올려놓았다.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민주의 질문에 박 선생은 아무런 말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박 선생은 커다란 배낭을 다시 둘러메더니 과사무실의 문을 열고 아무도 다니지 않는 복도 쪽을 향해 유유히 걸어 나갔다.

  박 선생이 나가고 민주는 자기 자리에 앉아 또각또각 멀어지는 박 선생의 발소리를, "띵"라고 울리는 엘리베이터 신호음을, 복도에 적막이 차오르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엔딩이 어떻든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니? 민주는 휴대전화의 버튼을 꾹 눌러 메시지가 와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고 보면 박 선생도 연애를 해봤겠지?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면서 민주는 연애하는 박 선생이 있는 과거나, 주호와의 관계가 끝난 이후 변해버렸을 그녀의 미래를 상상해보려 했지만 어느 쪽도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 대신 민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박 선생의 웃음이었다. 그전까지는 민주가 발견하지 못했던, 체념에 얼룩지지 않은 것 같은 말간 웃음. 그렇게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으나 창이 없어 풍경의 변화를 짐작할 길 없는 과사무실에 앉아 민주는 잠깐 동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끝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다만 여기, 여기의 온기에 집중하기 위해 아직은 따뜻한 차를 마셨다.

- 155~157쪽,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언제나 해피엔딩>

 

   이 짧은 소설을 읽으면 녹차를 맛있게 우려내 보온병이나 텀블러에 담아두고 어딘가 다른 곳에 가서 잘 닫은 뚜껑을 소리내어 연 뒤 천천히 마시고 싶어진다. 엔딩이 어떻든 다시 시작될 영화를 생각하면서.

 

   벽지에 붙여놓은 포스터가 계속 떨어져 인터넷 검색을 하니 약국에서 파는 3M 테이프로 붙이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 장마라 습해서 그런지 이것도 떨어진다. 길다란 테이블에서 일곱 명의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는 포스터를 벽에서 완전히 떼어내 창문에 붙였다. 처음부터 창문에 붙이고 싶었다. 햇볕에 색이 빨리 바랠 수 있겠다는 옆사람의 조언을 따른건데 어쩔 수 없지. 햇볕이 비치면 빨간색 카페트는 더 따스해지고 그림의 나무들은 더 생기있어 질 것 같다. 그러니 햇볕아 이제 제발 나와라.

 

  "차가 맛있네요."

  "그쵸? 녹차는 70도로 식힌 물에 딱 일 분 삼십 초만 우려야 맛이 있어요. 더도 덜도 말고 딱 일 분 삼십 초요."

- 152쪽,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언제나 해피엔딩>

 

  샤워하기 전에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씻고 나와 녹차를 더도 덜도 말고 딱 일 분 삼십 초 우린다. 그걸 텀블러에 넣고 뚜껑을 꼭꼭 닫고 회사에 가져가 마신다. 내일 아침의 목표다.

 

 

 

  1. 2020.08.12 17:4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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