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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면 는다
    서재를쌓다 2020. 7. 19. 16:50

     

       내 직업 인생은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맡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런저런 곳에서 말할 자리들이 있기는 했지만 <책읽아웃>을 맡고서야 비로소 '말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온라인 서점 예스24에서 새로 시작하는 도서 팟캐스트의 진행을 맡아달라는 섭외를 받았을 때, 처음엔 망설였다. 일단 이름이 괴상한 느낌이었다. 또 난 이미 10년 넘게 프리랜서로 생활하고 있었고 장기 여행도 곧잘 떠나는 편이라 2주에 한 번 고정 스케줄이 생기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이전에 해보지 않은 새로운 영역이었기에 나의 모토인 '하면 는다'를 되새기며 한번 해보기로 했다. 나는 '하면 된다'는 말은 싫어하지만 '하면 는다'는 말은 좋아한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일단 해보면 조금은 늘 것이다. 그리고 해봐야만 '아, 이 분야는 나랑 정말 안 맞는구나' 하고 판단이라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지레 겁먹기보다는 해보기나 하자 싶었다. 팟캐스트는 방송에 비해 더 새롭고 캐주얼한 영역이었고, 또 일방적으로 송출하는 방송보다 관심이 생기면 찾아 듣는 구독 방식이 내 성향에도 더 잘 맞을 것 같았다.

    - 94~95쪽

     

       나는 늘 그만두거나 도망치는 편이었다.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시도를 많이 했지만 본격적으로 해보지도 않고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거나 재능이 없어보이면 쉽게 그만뒀다. 도망도 많이 갔다. 그러는 편이 좋았다. 쉬운 길이었으니까. 그만두고 도망을 가면 그 일은 더이상 내 일이 아니었다. 나이가 드니 제일 후회되는 게 그 수많았던 포기와 도망이다. 그때 조금만 더 했으면, 더 그 모임에 나갔으면. 창피해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조금만 더 용기를 내었으면. 그러면 나는 지금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되었을텐데. 김하나의 말처럼 '하면 느는' 사람들을 보았으니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꾸준히 하는 것이 재능이었던 거다.

     

       동생은 계속 '하는' 사람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수영을 잘하고 싶어 수영장을 열심히 다녔는데 다른 수강생에 비해 실력이 늘지 않았다. 나쁜 젊은이들이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동생을 뒤에서 비웃는 것도 같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쯤에서 포기하는 사람이다) 실력이 늘어야만 중급반으로 갈 수 있는데 늘지 않아 초급반에 오래 있었다. 비슷하게 늘 출석하지만 실력이 자신보다 더 늘지 않던 할머니 수강생을 보며 의지를 해나갔다. 어느 날 배영을 배우는데 초급반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니 선생님이 동생에게 시범을 보여달라고 했다. 동생은 시범조교가 된 것에 뿌듯해하며 배영을 시작했다. 배를 보이며 물 위에서 열심히 팔을 휘저었다. 멋지게 잘해내고 싶어 정말 열심히 팔을 휘저었다. 그런데 위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 표정이 이상했다. 웃음을 참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결국 웃음이 터져 버린 사람도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동작을 할수록 점점 가라앉았고 결국 수영장 바닥에서 팔을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 이 에피소드를 집에 오자마자 이야기했고 동생도 나도 엄청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고민은 했지만, 수영장을 꾸준히 나갔다. 나쁜 젊은이들이 더 비웃는 것 같았는데 뭐 어때, 니네 나쁘다, 는 마음으로 계속 수영을 했다. 결국 중급반에 갔고 수영이 엄청나게 재밌어졌고 잘하게도 되었다.

     

       지금은 외국인 선생님에게 영어회화 수업을 받고 있는데 (코로나때문에 화상수업으로 진행한단다) 중급반을 선택하는 바람에 유창한 사람들에게 주눅들고, 선생님의 질문도 제대로 못 알아들어 몰래 번역기를 돌린다. 졸지에 '모든' 동물을 '먹고', 화장실 청소를 제일 좋아하고, 유럽 여행 중에 자신은 미국으로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초급반에 인원이 꽉 차 수업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도 꾸준히 수업에 들어가고 있다. 지난 주엔 '극복하다'는 표현으로 대화를 했는데, 무얼 극복한 적 있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자신은 지금 이 수업을 극복하고 있다고 말했단다. 매주가 극복이라고. 선생님은 칭찬해주었단다. 계속 수업에 들어오라고. 초급반 노노라고. 동생은 곧 자신의 의사를 영어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김하나의 말처럼 '하면 느니까'.

     

       오늘 골목식당 포항 편을 보면서 울어버렸다. 거기에 '하면 느는' 사람이 나왔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본 게 아니여서 이 사장님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 줄은 모르겠다.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고, 요리초보라는 자막이 나왔다. 수제차를 맛있게 만들 줄 아는 사장님이었는데 돈까스를 하고 싶다고 했다. 1년 가까이 공을 들인 터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수제차보다 돈까스를 하고 싶다고 했다. 백종원은 이 집은 적어도 하루에 30인분 이상 팔아야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면서 제작진의 점심 30인분을 선결제하고 갔다. 30인분 점심장사를 해보고 돈까스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잘 생각해보라는 것. 처음에 자신있었던 사장님은 결국 점심시간 1시간 안에 스탭의 점심을 모두 제공하지 못했다. 절망했지만 장사를 해야 했기에 자신에게 맞는 음식을 고민했다. 장사 시작 전 준비시간이 길더라도 손님이 주문했을 때 바로바로 나갈 수 있는 음식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죽은 어떨까, 까지 백종원과 이야기했다. 그 뒤 경북지역 코로나가 심해져 촬영은 삼개월동안 이어지지 못했다. 사장님은 그 삼개월이 손님이 없어 힘들었지만 공부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했다. 그동안 하루에 하나씩 요리를 해보고 사진을 찍어두고 노트에 레시피를 기록해뒀다. 그런 노트가 세 권이 되었다. 그리고 '덮죽'이라는 메뉴를 개발해냈다. 흐물흐물한 죽에 건더기를 올려 씹는 맛을 주자는 것이 사장님의 생각이었다. 자신은 없었지만 그동안 연습한 요리를 내보였다. 하나의 덮죽을 내보이고 또 하나의 덮죽을 조리하는 동안 백종원이 시식을 했다. 비주얼이 좋았다. 백종원은 이런 경우 맛이 없죠, 하며 한 입 떠 먹었다. 한 입 더 떠먹고, 한 입 더 떠 먹었다. 그리고 제작진을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청 맛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 덮죽을 만들어오고 긴장하고 있는 사장님에게 백종원이 사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다고 했다. 그러자 사장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 나도 이때부터 울어버렸다. 백종원은 노트를 만드는 동안 다 공부가 된 거라고 너무너무 잘하셨다고 했다. 사장님이 직접 만든 간장에 포항의 소라와 문어, 부추를 넣은 덮죽은 보기에도 정말 맛있을 것 같았다. 하면 느는 사람이 여기 또 한 사람 생겼다.

     

       친구는 올해 생일선물로 하얀색 라미 만년필과 검고 커다란 몰스킨 노트를 선물해줬다. 카드에는 내가 이 노트에 어떤 것을 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그것이 훗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큰 자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오늘 노트의 비닐을 뜯었다. 나도 꾸준히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하여 언제가 느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몇달 전에 산 3년 다이어리에 오늘은 꼭 일기를 쓰고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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