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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빙하 맛의 사과
    서재를쌓다 2020. 3. 30. 22:05

     

      많이 보는 게 중요하지 않아질 때가 오지.

      오래 전, 여행 선배들이 말했다. 그 말은 신묘한 점쟁이의 예언처럼 딱 맞았다.

      많이 보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시간 들여 천천히 보고 싶다. 먹는 것과 머무는 곳에 좀더 돈을 쓰고 무엇을 보기 위해 조바심을 내거나 안달 내지 않고 싶다. 전전긍긍과 근심걱정은 돌아가면 차고 넘치게 할 수 있다. 우선은 아침을 든든히 먹는다.

    - p. 64-65

     

       아비뇽에서 묵은 곳은 오래된 작은 호텔이었다.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아침마다 주인 할아버지가 내려주는 커피가 정말 맛있어요' 라는 리뷰 때문이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작고 사소한 것일 때가 많다.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잊힌 채로 선반 위에서 담담히 익어가는 과일이나 빛이 미처 닿지 않는 그늘에 눈과 마음이 기운다. 조금 비뚤어진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다정한', '주인 할아버지'나 '맛있는 커피' 같은 것에 마음이 약해지는 타입이다.

      빵과 커피, 약간의 잼과 주스 뿐인 소박한 아침상에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껏 들어요." 라는 다정한 말이 곁들여졌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마음이 가만히 움직였다.

    - p.123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 새도 없이 마트로 달려갔다. 좋아하던 요거트는 금방 찾았다. 건포도가 들어있는 시나몬 향 그래놀라를 즐겨 먹었는데 똑같은 제품은 찾을 수 없어 비슷한 것을 골랐다. 그리고 잼과 치즈, 햄과 빵에 과일과 채소 등을 잔뜩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한동안 빌린 집에서 매일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구워 간소하지만 든든한 아침을 먹을 것이다. 물론 시나몬 향 시리얼을 듬뿍 올린 바닐라 맛 요거트도 먹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난다. 생각해보면 여행 후에 문득 생각나는 것들은 으리으리한 궁전이나 박물관보다는 아주 사소하고 극히 사적인 것들이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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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자의 조식'이라는 부제가 붙은 <빙하 맛의 사과>의 첫 글 '볼로냐' 이야기를 읽을 때 그 밤이 생각났다. 혼자떠난 첫 유럽여행에서 맞이한 혼자인 밤. 난생 처음 비행기를 바꿔타고, 아주 긴 시간 비행한 뒤, 영화에서나 보았던 리스본의 공항에서 내려 동생과 함께 예약한 호텔을 홀로 찾아가는 밤. 택시를 타는 것도 무서웠는데 한밤 중이라 다른 선택지는 없었고 택시 아저씨에게 행선지를 말했지만 어디로 가는지 불안했던 밤. 과묵한 택시 아저씨와 타국의 라디오 소리, 낯선 풍경들. 무섭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던 그 밤. 다행히 무사히 도착한 호텔 앞에서 안도의 숨을 내뱉고, 체크인을 하고 침대 두개가 나란히 놓인 방에 입성했던 밤. 테라스의 야경에 감탄하고 씻고 잠들었는데, 잠이 잘 왔었나 설쳤었나. 그렇게 낯선 여행지에서 비몽사몽 밤을 보내고 맞이한 첫 아침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침의 테라스 밖 풍경은 눈부셨다. 밤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활기차고 빛났다. 낯선 햇볕이 그득했다. 밤에 멈췄던 것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아침의 활기찬 기운으로 식당으로 내려가 방 번호를 말하고 접시 한 가득 음식을 담고, 잔에 까만 커피를 가득 채워 혼자 조식을 먹었더랬다. 맛있더랬다. 다리가 아픈 동생에겐 미안했지만, 긴 시간 걸려 혼자서라도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 생각하다보니 여행가고 싶어졌다. "호텔에 도착한 건 늦은 밤이었다."로 시작해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로 끝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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