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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희에게
    극장에가다 2019. 12. 26. 22:22

      

       왜 오타루에 눈이 가득한 장면이 이상하다고 느껴졌을까. 오타루보다 더 눈이 오지 않나, 라고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을까.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도 오타루였는데. 겨울에 눈이 쌓인 운하에 ㅂ찔끔찔끔 나던 오타루.

       <윤희에게>에서 윤희는 오타루에 가게 된다. 옛 친구가 있는 곳. 언젠가 꼭 보고 싶었지만, 어쩌면 영영 못 볼 사람이라 생각했던 고운 사람이 있는 곳. 윤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억누르며 버티고 버티던 직장을 어느 날 그만둔다. 출근할 때만 해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매일 아침 그러고 싶었지만 매번 그러지 못했다. 올해 못 쓴 휴가를 쓰겠다는 말에 돌아오면 자리가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책임자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공장을 돌아서 나오던 장면이었다. 내내 침울했던 윤희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김희애에게 어울리는 않는 역할인 것 같았는데 그제서야 마음이 열리더라. 그리고 오타루에 가게 된 윤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근사한 코트를 입을 줄 아는 사람, 더이상 담배를 숨어서 피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여행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전혀 다른 모습의 내가 될 수 있는 통로. 

       제일 마음에 남는 장면에는 윤희가 평생 그리워하는 준이 등장한다. 준은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앞자리의 여성에게 말한다. 그전과는 다른 단호한 표정이 되어서. 세상의 어떤 것은 꼭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감당할 수 없는 건 평생 숨기고 살라고. 그 장면에서 준이 얼마나 단단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그건 한때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를 오랜 시절에 걸쳐 스스로 극복해낸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영화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달이 점점 차오른다. 당연하게도. 그리고 두 사람은 만난다. 기적같이. 두 사람이 얼마나 걸었는지, 걸으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약속을 했을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영화를 보고 밤길을 걷다 가득 차오른 달을 보게 되었을 때 함께 오타루의 눈덮힌 운하를 나란히 걸었을 두 사람을 떠올렸다. 준은 단단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윤희의 얼굴에는 근사한 생기가 돌았다. 어쩐지 자꾸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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