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이었다. 종로에 반지를 보러 가는 날이었는데, 일찍 도착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카페 뎀셀브즈에 갔다. 아주 예전엔 종로에 오면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었는데. 맥주도 한 잔 하고. 스폰지하우스가 있고, 이런저런 작은 영화들을 볼 수 있었던 아주 예전에. 카페 뎀셀브즈에 가면 언제나 그 시절 생각이 난다. 그립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하고. 내가 첫 손님인 듯 했다. 매장에 직원들만 있었다. 출출해서 샌드위치를 먹어볼까 케잌을 한조각 먹어볼까 고민하다 그냥 커피만 시켰다. 곧 점심을 먹을 거니까. 차가운 커피가 담긴 쟁반을 받아들고 2층으로 가 아무도 없는 넓은 홀의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다시 읽기 시작한 책. 처음에 잘 읽히다가 중간쯤 진도가 나가지 않자 덮어두었는데, 몇개월이 지난 그 날 다시 들고 나왔더랬다. 그 곳, 그 시간이어서 그런가. 무척 잘 읽혔다. 그렇게 술술 후반부까지 읽었던 책. 이 책을 다시 읽게 되면 그 날 혼자였던 종로가 생각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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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나서는 순간, 모험이 시작되니까요. 

- 20쪽


   번역가로서의 경력은 폴러의 말처럼 미국식 나쁜 남자 친구였다. 아무리 지고지순하게 사랑하고 가끔은 애태우며 나를 보아달라고 말해도 나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다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때 사랑한다 말하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연락을 끊기도 했다. 하지만 당분간 혼자여도 상관은 없고 외롭지도 않다. 누가 날 사랑해주건 그러지 않건, 청혼 반지를 꺼내건 말건 내가 매 순간 그 대상을 진심으로 대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적어도 한 번은 괜찮은 여자였으니까. 괜찮은 여자는 홀로 있어도 빛이 나고, 언제 어디서나 고개를 들고 당당히 걷는 법이니까.

- 31쪽


   down to earth는 '소박한, 허세가 없는'의 뜻도 있지만 '진실한, 진짜인, 자기 자신의 모습대로 솔직한'의 의미도 있다. 

   이 단어는 아무리 봐도 우리 가족을 한마디로 묘사하는 단어였다. 허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어떤 잘난 척도 하지 못하고 남들 시선보다는 자기 자신에 솔직하고 실속 있고 현실적이고 선량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정 많은 사람들.

   이제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일요일, 버스를 타고 학교에 공부하러 가는데 우연히 같은 버스에 탄 엄마와 아빠가 나를 발견하고 마냥 좋아서 웃던 장면을 기억한다. 사장님이라 불리던 시절에도 주머니에 늘 토큰을 가지고 다닌다며 자랑하던 아빠의 미소를 기억한다. 방송 작가 시절 새벽 방송을 할 때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을 챙겨주기 위해 부엌으로 가던 엄마의 등을 기억한다. 목소리 크고 성미 급한 언니와 심리학 박사 학위가 있지만 자기 말투가 '쌈마이' 같다는 동생과 한 번도 돈 문제로 다투거나 서운해한 적 없었던 걸 떠올린다. 그리고 내가 변변치 못한 직업들을 전전하고 결혼 생활에 위기를 겪을 때도 한 번도 나를 비난하지 않고 무조건 사랑해준 부모님과 자매들이 얼마나 훌륭한 이들이었는지, 학벌이나 취향 따위가 얼마나 인간의 본질과 관련이 없는지를 이해한다. 

- 37-38쪽


   내가 번역한 <자존감이 바닥일 때 보는 책>의 저자 나다니엘 브랜든은 예순쯤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대체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이 10년 단위로 긍정적으로 변한다고 말한다. 10대, 20대, 30대에 내가 부모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다. 40대인 지금은 부모님에 대한 존경과 애정만이 가득하다. 50대나 60대가 되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부모님이 내 곁에 오래 계시기만을 기도할 것이다. 

- 38쪽


   나 같은 일급 변덕쟁이가, 나처럼 손해 보면 발끈하는 사람이, 때론 억울하다 싶을 정도로 보상도 적고 다른 곳에 눈도 못돌리게 하고 능력에 매번 좌절하게 하고 아무리 해도 절대로 쉬워지지 않는 이 작업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어떤 내용이든(내 기준에서는) 한 권 한 권 최대한 꼼꼼하게, 완벽하게 해내는 동안 나도 조금은 변화했다. 

   나와 내 삶이 아무리 지긋지긋하고 때로 망할 것 같아도 일단은 앉아서 버텨보는 능력이 조금은 발달한 것이다. 좋은 것만 쏙쏙 단물 빼먹듯이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배우고 투자한 만큼 돌려받지 못하는 인생의 진리를 깨치고 버티고 버틴 끝에 찾아오는 정당한 자유의 맛을 알았다. 

- 85쪽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판단하지 않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실수를 인식하고 있으니까. 우리 내면의 불안과, 우리의 숨겨져 있는 의도와, 우리의 실패들을. 그래서 내년 나의 소망은 나 자신에 조금 더 여유를 주는 것이다. 나쁜 점은 덜 보고 좋은 점은 더 보길. 그냥 나 자신에게 여유를 주고 싶다."

- 110쪽




  1. 2019.10.30 16:2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9.11.01 15:30 신고 BlogIcon GoldSoul

      이곳에 오고나선 극장 가는 일이 쉽지가 않아요. 평일에는 퇴근하느라 바쁘고, 주말에는 거리가 있어 잘 나서지 않게 되네요. 흑흑- <82년생 김지영>은 어떠셨어요? <벌새>도 그렇고 이번주에는 보자, 그러고만 있어요. 왜 다투셨어요? ㅠ 얼른 보고 싶어요. 책도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은 채 책장에 꽂혀져만 있는데. 주위에서 얘기만 계속 듣고 있어요. 어제는 SBS 접속무비월드에서만 잠깐 보았답니다. 헤헤-

      이제 함께 산지 두달이 넘었는데, 지금까지는 좋아요.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니 서로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살림하는 것도, 마음 쓰는 것도. 저는 청소는 잘 하지 못하는데, 요리를 좋아해요. 같이 사는 사람은 반대인 것 같아요. 아, 생각해보니 청소를 '좋아'하는 것 같진 않네요! 어쨌든 아직까진 잘 맞춰가고 있어요-

      역시! 그 시절의 종로를 아시는구나. 저는 스폰지하우스에서인가 그 극장에서 하는 시사회 회원(?)이었던 때가 있었어요. 정기적인 예술영화 시사회가 있었고, (좀 특이한 영화가 많았던 것 같아요. 개봉하지 않기도 하고) 주말 아주 이른 시간이었는데 그걸 혼자서 보고 나오면 생각도 많아지고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어요. 헤헤- 종로 한복판에 2개관인가, 극장 안에 커다란 기둥이 있던(;;) 극장이 있었는데 (한참을 검색해보니 코아아트홀이었어요!), 거기서도 묘-한 영화를 엄청 보았더랬어요. 균형님도 거기 자주 가셨을 것 같아요. 같은 관, 같은 시간에, 같은 영화를 보았을 수도 있었겠어요. :)

      다 없어져버렸어요. 정동길의 심야영화관도, 창문이 스르르 열리던 대학로의 극장도, 원형의 연극무대 같고 작디작은 스크린이 참 멀리도 있었던 북촌의 극장도. 그래도 이렇게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참 다행이에요. :-D

    •  address  modify / delete 2019.11.05 11:28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9.11.07 15:37 신고 BlogIcon GoldSoul

      친구네 부부가 결혼하고서 주말에 정말 잘 돌아다녔다고 해서 우리가 너무 집을 좋아하나 생각했더랬어요. 정말 약속이 있지 않는 한 주말에는 집밖으로 거의 나가질 않아요. ㅎㅎ 평일에 집에 오래 머무를 수 없으니 아쉬운가 봐요. 사실은 게으른 것!

      아, 김지영 동반 관람에 관련해서 동생에게 이런저런 주변의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어요. 어제는 엄마가 같이 사는 사람 생일이라 생선을 많이 보내줬는데 그걸 한마리씩 포장해서 냉동실에 넣는 일을 함께 하는데 '도와준다'는 표현을 하더라구요. 계속 그건 잘못된 말이라고 말했어요. 함께 하는 거라고. 뭐, 거기에 대해선 아무 대꾸도 안했지만, 다음번에 그런 말을 할 때 조심하겠지 생각했어요. 서로 조금씩 나아지면 된다고 생각하면서요. 얼른 화해하셔요. 벌써 화해하셨을 게 분명하겠지만요. :)

      그 극장들이 추억이 되면서 그 공간을 각자의 시간으로, 이렇게 함께 추억할 수 있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정말 극장들이 계속 되고 있었더라도 균형님의 말씀대로 그 시절의 열정은 사라져버려서 그렇게 열심히 다닐 수 없었을 거예요, 분명. 이렇게 쓰고보니 우리의 열정과 함께 극장들이 사라져 버린 것 같네요. 후후-

      십일월에는 보고 싶은 영화를 꼭 한 편 극장에서 보아야겠어요! 불끈- 주말이 다가와요. 저는 이번 주말에 집을 벗어나 태안에 놀러가는데 함께 가는 이들이 있어 어떨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고 그래요. 균형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길가의 단풍들 오래 눈에 담아두면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