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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리데기 - 이런 세상이라서 미안해
    서재를쌓다 2007. 8. 12. 20:54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목이 말라왔다. 냉장고로 가서 물통을 꺼내 커다란 물컵에 가득 따라서 벌컥벌컥 마셨다. 일요일 저녁의 집 안이 너무 조용한 것만 같아 라디오를 켰다. 그리고는 어젯밤에 널어놓은 빨래를 하나씩 개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열어놓은 창문 너머로 보니 밖이 주홍빛이다. 아니, 정확한 색을 대지 못하는 오묘한 빛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빛이 그렇다. 그러다 갑자기 1분동안 세차게 비가 내린다.

       황석영 선생님을 한번 뵌 적이 있다. 학교에서 강연회가 있었는데 그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세세하게 기억 나진 않지만, 나는 그가 참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키도 컸고, 체격도 컸다. 목소리도 컸고, 웃음도 컸고, 그가 하는 이야기들도 컸다.

       <바리데기>. 두번째로 그의 작품을 읽었다. <오래된 정원>을 읽을 때보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서 놀랐다. 이러다가 하루도 안돼 다 읽어버릴 것만 같아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한 장 한 장 읽어나갈 때마다 바리의 이야기가 마음에 시려, 목에 턱턱 걸렸다. 책 속에서 누군가가 죽게 되면 나는 책장을 덮고 그들을 오래 생각한 뒤 다시 읽어나갔다. 정말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들 같아서 그들을 그냥 읽으면서 흘러 보내서는 안 되겠다고, 한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어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책을 읽은 후의 황석영 선생님의 인터뷰를 보니 책의 묘사가 실제인 것이 많았다. 중국 등지에서 답사와 취재를 철저히 한 것이며, 런던의 이주민들과의 인터뷰들, 바리할미가 나타나는 부분은 그가 직접 꿈을 꾼 것을 묘사한 것이고, 영국 국적의 파키스탄 2세 청년들이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혔다가 돌아온 사건도 실제로 있었단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직접 겪은 9.11 테러사건이나 런던버스 폭발 테러사건까지.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 '현재'의 이야기들이여서 마음이 더 시린 것이었다.

       <바리데기>는 바리의 이야기다. 북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중국으로 탈출했고, 그러는 동안 가족을 잃었고, 런던으로 밀입해서, 파키스탄 남자와 결혼하게 되고,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잃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나가야 하는지 버리고 살아나가야 하는지 막막한 시대를 살아가는 바리, '우리'의 이야기다.

       <바리데기>에는 우리 시대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북한, 소외받고 위협받는 사람들, 런던에 모여사는 여러 민족들, 그들의 종교, 그들의 삶, 그들의 고통. 설화에서와 같이 바리는 아이를 잃은 후, 보름동안 꿈을 꾸면서 힘들고 절망적인 나 자신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수를 구하기 위해 지옥을 지나가게 된다. 피바다, 불바다, 모래바다로 이루어진 지옥의 바다를 건너갔다가, 결국 설화와 같이 생명수를 찾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길에 바리가 우리들을 향해 말한다. 그 말들은 너무 직설적이고 정확해서 마음을 콕콕 찌른다. 전쟁을 일으키고, 각자 자신의 종교만 소리 높히고, 고통을 주고 받는 이 세상 너희들은 이제 양보하든지 목소리를 합하든지 침묵하라고. 이 모든 고통은 모두 너희들의 욕망 때문이라고. 너희들은 승리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승리한 적도 패한 적도 없다고. 모든 것은 너희들의 절망에서 비롯된 거라고.
         
       그렇지만 희망을 버리면 안된다고 말한다. <바리데기>에 등장하는 압둘 할아버지는 우리 모두가 철없는 것들이라고, 전쟁은 우리들이 만들어낸 절망이라고. 하지만 우리들이 가져야 하는 것은 믿음과 희망이라고. 책 읽으면서 압둘 할아버지가 작가 자신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켜보거나 침묵하고, 절망적인 세상이지만 우리 희망만은 버리지 말자고 토닥여주는.

        소설의 말미에 남편이 돌아오고, 다시 일상의 행복으로 돌아갔을 때 바리가 느끼는 것. 너무나 평화로워서 하마터면 세상이 달라졌다고 느껴졌다는 그 때. 런던의 버스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나고 그 가까이 있었던 바리는 눈물을 흘리며 뱃속의 아이에게 말한다. 아가야, 미안하다. 우리도 계속 태어나고 있는 또 다른 바리에게 이런 세상이라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절망을 버리지 말자고 말해야하겠지? 그리고 이런 세상이 아닐 수 있게 만들어가야 하는데. 우리들 모두를 살릴 생명수는 가까이 있다지만 우리 마음은 너무 어두워져서 찾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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