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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젠가, 아마도
    서재를쌓다 2019. 7. 31. 00:55



       내게 여행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편하게 쉬다 오자고 떠나도 여기까지 돈과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왔는데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불안해서 남들이 하는 여행을 검색해보고 따라해보고 기념품들을 샀었더랬다. 그런데 돌아보면 기억에 남는 추억들은 남들이 하지 않았던 것, 검색해서 잘 나오지 않았던 것들이다. 숙소에서 하루종일 쉬어도 괜찮은 거였다. 그곳도 내가 고르고 고른 나의 또 다른 여행지인 것이다. 이런 생각도 남들과 비슷한 여행을 여러번 해보면서 느낀 것. 그 경험들을 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들. 비슷비슷한 여행이었음에도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순간순간들이 있었다. 함께 하는 사람 덕분에, 혼자였기 때문에. 아무튼 결론은, 우리들의 여행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특별하다는 것. 어떤 여행도 잘못된 여행은 없다는 것. 외로운 것도 여행이었다는 것. 정말 좋은 여행이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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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자라는 약한 존재가 되고 난 뒤에야 나는 사람의 선의에 기대는 법을 익히게 됐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에게는 근처에 있는 호텔을 찾아가는 게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 동네 주민에게는 산책만큼 쉽다. 그러므로 그 여행자에게 필요한 행운은 단 한 사람, 그 호텔의 위치를 아는 현지인을 만나는 일이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도, 대단한 결심이 아니어도 괜찮다. 서로가 약간의 용의를 내기만 하면 된다.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용의, 선뜻 도와주겠다는 용의. 여행지의 행운이란 이런 두 사람의 만날 때 일어나는 불꽃 같은 것이다. 

    - 5쪽


       막상 간절하게 원하면 쉽게 구할 수 없다. 이건 오르골의 법칙이다. 이걸 뒤집으면 쉽게 구할 수 없다면 간절하게 원하게 된다. 이건 도루묵의 법칙이다. 그러고 보면 서울의 거리를 걷다가 마치 낯선 여행지처럼 느껴질 때가 몇 번 있었다. 나 혼자 하염없이 걷고 있을 때, 이별했을 때, 이제 다시는 누군가와 웃으며 그 거리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돌이켜보면 바로 그때가 도루묵의 법칙이 작용했을 때였다.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 도처에 널려 있는데도 간절히 원하지 않는 인생이란 어쩐지 낭비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 27쪽


      국경 쪽으로 세차게 부는 바람 속으로 날아가던 모자처럼 여행지에 내가 남겨 두고 온 것은 또 얼마나 많은지. 갖가지 잃어버린 물건부터 보지 못하고 온 것과 사지 못하고 온 것에 이르기까지. 그럴 때마다 그랬던 것 같다. 차를 돌릴 수 없으니 마음을 달랠 수 밖에, 라고. 밤의 알람브라가 내게 가르쳐준 것도 그런 것이었다. 여행이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라고. 그러고 보면 여행을 통해 나는 비정함을 익혔다. 눈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토록 찬탄하던 곳과 작별하는 법을 알게 됐으니까. 이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을 알면서도 말이다. 친구처럼 지낸 이들과도, 또 아꼈으나 잃어버린 물건과도 아무런 미련없이. 이젠 알겠다. 그렇게 해서 내가 이 삶의 원리를 배웠다는 사실을. 그레이트! 베리 굿! 다만 그뿐이라는 것. 떠나는 순간에 아쉬움이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

    - 31쪽


       그렇다면 그 시절 나는 청춘이었겠다. 그저 시간만 잔뜩 있을 뿐,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어 낯선 도시의 도서관에 멍하니 앉아 있던 그날 오후의 나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캐리어를 끌고 마드리드 시청역에 도착했을 때부터 나는 어찌나 서툴고 허술했던지. 어쩌자고 나는 이렇게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왔으며, 어쩌자고 마드리드라는 곳은 이런 곳인지. 캐리어는 무겁고, 에스컬레이터 같은 것도 없고, 끌고 가자니 길은 울퉁불퉁하고, 지하철로 다시 내려가자니 계단은 무수히 많았다. 가이드북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인터넷을 수없이 검색했지만, 여행 중에는 뭘 어떻게 하든 능숙해질 수 없다는 걸 실감했다.

    - 38-39쪽


       하지만 혼자 여행하는 일의 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 거기, 고단함에. 아침에 일어나면 또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막막하다. 책을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걷고 또 걸어도 시간은 좀체 흐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관광지를 둘러보다 보면, 세상의 모든 관광지란 홀로 여행하는 자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혼자가 아니었다도 나는 그렇게 열심히 박물관과 미술관, 성과 대성당을 둘러봤을까? 어쩌면 이렇게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앉아 슈퍼마켓에서 산 샐러드와 빵을 먹던 나는 스트레인저라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됐다. 그건 어떤 사회적 연결 고리도 없는 단독자를 뜻한다는 것을. 단과 독, 때로 여행은 그 단어의 뜻을 체험하기 위한 이일이기도 하다. 

    - 43쪽


       리스본이 하구의 도시, 석양의 도시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파두 때문이었을까? 장난감 같은 트햄과 골목의 풍경이 하도 애틋해서 였을까? 마치 한 시대가, 한 생애가 끝나는 순간의 감정처럼 막대한 노스탤지어였다. 얼마나 대단한 그리움이었던지 그 순간 리스본에 있으면서도 나는 리스본이 그리웠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리스본이 그립다. 

    - 102-103쪽


       남자는 장발에 트렌치코트를 걸친 펑퍼짐한 인상의 중년이다. 그는 전철에 타자마자 캔맥주 꼭지를 타더니 시원스레 들이켠다. 하긴 여행자에게는 언제라도 캔맥주의 꼭지를 딸 수 있는 특권이 있으니까. 고토쿠인의 대불 같은 가마쿠라 관광 명소를 둘러보는 동안, 조금씩 밝혀진 남자의 정체는 연극배우였다. 아무래도 예술가여서일까, 그는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면 술부터 찾았다. 그렇게 차수를 늘려가며 동네 술집을 돌아다니는 사이 여행 프로그램은 자연스레 음주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말하지면 '가마쿠라 술꾼 기행'인 셈이었다. 동병산련일까. 어쩐지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173쪽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되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미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 

    - 178쪽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역을 나서자 아는 골목이 하나도 없는 낯선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서울은 마치 내가 그토록 읽고 싶어 하던 소설책과 같았다. 표지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 멋진 책을 앞에 놓고서 누가 발췌독을 하리오? (누가 버스를 타고 다니리오?) 누가 요약된 줄거리와 서평에 만족하리오? (누가 패키지 투어에 참가하리오?) 오랫동안 기다린 책이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통독해야 마땅하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면서 구경해야만 한다. 

    - 191쪽


        여행이 끝나고 원래 머물던 곳으로 돌아오면 사람들은 여행은 잘했느냐고 묻고, 그런데 살은 왜 그렇게 빠졌느냐고 묻는다. 글쎄, 나는 여행 갔다가 살이 쪄서 돌아오는 사람이 더 이상하긴 하지만 "먹는 게 시원찮아서"라고 대답해준다. 그러면 대개 만족하니까. 그들은 만족하고 나는 살이 빠졌으니 더 바랄 게 없다. 

    - 193쪽


       한 객실에 11명씩, 마치 군대 막사 같은 공간에 누워 있었다. 옆에 있는 아저씨는 잠이 안 오는지 연신 소주를 마셔댔다. 관부연락선이라는 말은 이상에 대한 소설을 쓸 때 처음 들었다. 죽기 한 해 전 이상은 일본에 가려고 부산으로 내려와서도 도항증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어렵사리 시모노세키행 배에 올라타고 바다를 건너와서는 다시 도쿄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 당시 경성에서 도쿄까지는 이틀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도쿄에 도착한 이상의 첫 소감은 "와보니 실망이오"였다. 그렇게 실망할 것이라면 왜 그렇게 도쿄에 가고 싶어했는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려면 역시 이틀에 걸쳐 배와 기차를 갈아타면서 도쿄까지 가봐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상념 끝에 나는 잠이 들었다. 

    - 196-197쪽


       평상시 우리가 배우들처럼 다른 캐릭터가 되어볼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자라면 다를 것이다. 출국 심사를 받기 전에 여권을 심사관에게 건네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그건 자신에 대한 정보가 적힌 여권을 제출함으로써 이 나라에서 살던 자신을 반납했음을 명시하는 절차라고. 잘 안되면 수염이라도 붙여보자. 이렇게 다양한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본래의 나로서만 살아가는 것도 엄청난 낭비일 테니까. 

    - 241쪽


       이동 시간이 이처럼 획기적으로 줄어든다면, 우리는 여행의 목적을 더 잘 알게 되리라. 여행의 목적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게 있다는 걸. 그러므로 여행자란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바뀐 풍경은 낯설다. 새롭고 또 신기하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상대적인 이야기다. 나를 둘러싼 풍경만 낯설고 새로운 게 아니라 그 풍경 속의 나 역시 낯설고 새로운 존재, 즉 이방인이다. 하루나 이틀 전, 그러니까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나를 떠올리면 이건 기묘한 변신담처럼 느껴진다. 

    - 255쪽


       지난 몇 년 동안, 이따금 떠오르는 여행의 기억들을 이 책을 통해 풀어놓았다. 그렇게 떠오른 기억 속의 나는 일상 속의 나보다는 조금 더 고독하고 조금 더 활동적이고 조금 더 유쾌했다. 그런 나의 모습 뒤로는 늘 이국의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달라지면 내가 달라진가는 건 확실했다. 그게 바로 여행의 목적이었다. 이제 모든 여행은 끝났다. 이제는 바로 여기, 지금 이 세상에서도 나를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나 자신을 바꿀 수 있을까? 진짜 여행이 이제부터 시작된다. 

    -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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