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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 피델리티 - 귀가 즐거운 소설
    서재를쌓다 2007. 8. 10. 14:22
    하이 피델리티
    닉 혼비 지음, 오득주 옮김/Media2.0


       나는 그 아이랑 헤어진 후 어떻게 할 지를 몰랐다. 그래서 술을 마셨고, 매일 울어댔고, 내 생활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때 내가 한 일이라고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같은 하숙집에 있었던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며 내 넋두리를 하는 거였다. 그럴리야 없어. 니가 더 잘 알잖아. 얼마나 나한테 잘해줬던 아이였는데. 한순간 이렇게 모질게 변해버릴 순 없는거다. 친구는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여줬고 술잔을 내밀어줬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항상 비가 왔다. 그 여름, 내가 흘린 눈물만큼 많은 비가 왔다.
      
       가끔 그 아이한테 전화를 했다. 그 아이는 받지 않거나, 받게 되면 화를 냈고, 나는 그런 그 아이가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전화기에 대고 무슨 말들을 내뱉었다. 어찌되었든 우리가 함께 사랑했던 추억들은 모조리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박살났지만, 나는 그걸 인정하지 못했다. 문제는 나 혼자 그걸 인정하지 못했다는 거다.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 더이상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었을 때, 매일 흘러나왔던 눈물이 더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알았다. 이제 너와 나, 우리의 추억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추억이 되어버렸다는 걸. 나만의 추억.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는 아직 보지 못했다. 사실 봤던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보았다면 그 때 그아이와 함께였다. 그 때 우린 꽤 많은 영화를 함께 봤었으니까. 내가 무의식에 잊으려고 노력한걸까, 아님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걸까. 그 시절의 기억들은 너무나 단편적이라 내 기억들이 온전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를 보지 않고, 닉 혼비의 <하이 피델리티>를 읽었다. 그리고 오늘 술을 몇 병 사서 들어왔다.

       <하이 피델리티>를 소개하는 잡지의 기사 중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이 책이 좋게 느껴진다면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작은 부분에도 강박을 느끼거나 큰 감수성을 드러낼 수 있는 '쪼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 고백한다. 나는 이 소설이 좋았다. 그리고 나는 '쪼다'일 수도 있겠다.  

        <하이 피델리티>는 '로브'라는 서른다섯의 남자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로브는 서른다섯이지만, 여전히 서툴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사회적인 면에도, 사랑에 대해서도. 로브는 '챔피언십 비닐'이라는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고 있지만 수입은 있는둥 마는둥이다. 어울리는 사람들은 가게에서 일하는 딕과 베니, 그리고 몇 명의 친구들. 그리고 소설이 시작되면서 로브는 말했다. 방금 '로라'와 헤어졌다고. 로브는 로라와 헤어지고부터 생각하기 시작한다. 아니, 그 전부터 생각해왔다. 왜 내가 그 때 너희들과 헤어져야 했는지, 너는 왜 결국 나를 뻥 차버릴 수 밖에 없었는지. 로브는 그녀들에게 찾아가 묻고싶어진다. 그리고 묻는다.

       모든 이별이 쿨하지 않다. 두 사람이 동시에 사랑에 빠졌듯이 동시에 사랑이 끝나면 좋겠지만 사랑이란 걸 대단히 그렇지 않다는 걸 이별을 겪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모두들 쿨하게 사랑하고, 이별해야하고 싶어하지만, 사실 쿨하게 이별하는 방법은 없다. 두 사람이 한 날 한 시각에 서로 정이 떨어진 경우가 아니라면, 이별을 통보받은 한 사람은 우리의 이별이 믿을 수 없고, 이별을 통보한 사람 또한 나의 사랑이 이렇게 끝나버린 걸 외면하고 싶을 거다. 그렇게 '이별들을' 통보 받은 로브는 문득 왜 내가 늘 이렇게 사랑했던 누군가와 지금까지도 이별하면서 지내야하는지 궁금했던 거다. 그리고 그 뒤로도 그녀들이 잘 살고 있는지. 속으로는 나와 이별한 후로는 못 살기를 바라면서.

       성장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로브가 소설 속에서 대단히 성장한 건 아니다. 그는 그저 서른다섯에서 서른여섯이 되었고, 자신을 떠났던 로라는 다시 자신을 찾아 돌아왔고, 여전히 사랑이란 건 때때로 힘들고, 인생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다. 하지만 로브는 자신의 곁으로 다시 돌아온 로라를 통해서 사랑이란 건 늘 열정적이고 육체적일 수는 없다는 걸, 누군가가 옆에서 나를 지켜봐주고 응원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이 되는 일인지를 알게 되고, 세상에는 나와는 음악적 취향이 달라도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 많고, 그들과 나눌 이야기 또한 음악 말고도 무궁무진하다는 걸, 그래, 세상이 그렇게 냉랭하지 않고 꽤 따뜻한 곳이라는 걸 알아간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늘 음악이 있다. 세상은 음악과 통하고, 음악과 연결된다는 그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변두리의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아도 그 속에서는 온전한 내가 되는 곳, '챔피언십 비닐' 레코드 가게. 거기에 서른 여섯이 됐지만, 여전히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음악이 있어 풍요로운 곳. 나는 그 곳이 좋다. 돈이 있어 육체가 풍요로운 것이 아닌, 음악이 있어 영혼이 풍요로운 곳. 그래서 나는 '쪼다'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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