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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먹고 갑니다
    서재를쌓다 2018. 4. 2. 22:47



        '잘'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난해 수술을 하면서 알았다. 수술을 하기 전에 몸을 가볍게 한다고 덜 먹고, 하기 직전에 몸 속의 것들을 모두 빼내고 금식을 하고, 입원을 하면서 먹은 푸짐하고 건강했던 세끼 병원밥, 수술 후에 시간을 들여 챙겨먹은 단백질과 채소와 과일들, 그리고 한동안의 금주, 쉴새 없이 마셔댔던 물과 차. 지금 또 다른 의미로 '잘' 먹고 있으면서 그때 내가 얼마나 건강하고 가벼웠는지 새삼 깨닫고 있다. 그래서 이번주부터 조금씩 그날들로 돌아가려고 걷고, 건강한 저녁을 가볍게 챙겨먹었다. 


       <잘 먹고 갑니다>는 병규가 정한 시옷의 책인데, 모임이 미뤄지고 늦어진 탓에 한겨울에 읽었던 책을 저번주에서야 모임을 가졌다. (손꼽아 기다렸지만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나 ㅠ) 병규가 이 책을 한다고 했을 때, 많은 부분 공감하며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수술과 입원의 날들이 없었다면 그렇지 못했을 거다. 병원에서의 밥 한 끼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밥의 힘이라는 게 얼마나 커다란지 책에 나오는 분들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다행이 내가 있었던 병원은 책 속 병원 만큼은 아니지만 밥에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이었다. 


        호스피스 병원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들이 개별적으로 원하는, 추억이 담긴 음식을 주문하는 '요청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환자들은 이 특별한 요청식을 입으로 먹기만 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꼭꼭 씹어먹으며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한다. 슬프기도 했지만 따스했다. 따뜻한 밥 한 끼, 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그런 식사들. 




       잡지 편집자 시절, 복잡한 시가지의 정취나 지친 마음을 달래는 요리처럼 '바쁜 일상을 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것들을 가르쳐준 선배가 있었다. 업무상 직속 선배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가끔 나를 데리고 나가 유쾌하게 먹고 마시기를 즐겼다. 선배는 언제나 그런 즐거움을 다른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애쓴 사람이었다. 나비넥타이로 멋을 낸 차림새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늘 과도하리만치 서비스 정신과 위트가 넘쳤다. 

    - 6쪽


       "맛있다. 맛있어. 고마워."

       선배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빙긋 웃더니 다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그리고 나중에 천천히 즐기고 싶다며 보온병을 자기 곁에 소중하게 놓아두었다. 선배는 양식점 '알래스카'의 콩소메 스프가 어떤 노력과 시간을 들여 만들어지는지부터 시작해서 풋내기 시절 주방에서 혼났던 이야기, 젊을 때 '진국'이라 불리는 사람과 물건과 요리를 만나는 일이 앞으로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건강했을 때와 비슷한 성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훌륭한 어조였다.

    - 9-10쪽


       건조시킨 잔새우를 물에 담가두면 좋은 육수가 되지. 소면 국물은 그거랑 표고버섯으로 육수를 내는 거야. 주변 사람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국물은 항상 많이 만들었어. 한번은 조카 집에 그 집 시어머니가 오시게 되었는데 밥은 무얼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더라고. 마침 여름이라 소면이 좋다고 했지. 국물을 만들어서 커다란 병에 넣은 다음 톳도 삶아서 함께 내라면서. 톳을 싫어하는 노인은 없잖아. 그 다음은 구운 연어의 살을 발라서 갓 지은 밥에 섞은 연어 밥을 권했지. 그 위에 구워서 잘게 자른 달걀지단하고 김 가루를 뿌리면 충분히 맛있어 보이거든. 

    - 52-53쪽


       내 성격이 시원시원하다고? 그건 말이지. 젠체하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고, 좋은 건 좋은 대로 싫은 건 싫은 대로 자연스럽게 살아서 그런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 56쪽


    ... 환자는 식사를 입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해요. 그 마음에 다가서는 일이 중요하지요."

    - 61쪽


    ... 먹을 수 있으면 기분이 차분해지고 자연히 몸도 좋아지는 기분이 들어요. 병문안을 온 사람이 안색이 좋다고 말해줬어요.

    - 73쪽


    히로오 씨 : 때마침 중국 쑤저우 투어에 참가했었는데 아주 즐거웠어요. 투어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 부부로 참가했던 유치원 선생님이 "이렇게 같이 와서 즐거웠으니 앞으로 또 함께 가요"라며 모두의 연락처를 수첩에 적었어요. 집에 돌아온 다음 날에 벌써 엽서가 도착했더군요. 그 이후 20년 동안 알고 지냈어요. 

    아사코 씨 : 그중에 의사분이 계셨는데 12월 28일까지는 병원 문을 열고 싶다고 하셔서, 매년 29일부터 1월 5일까지 6일 동안만 여행을 다녔어요. 캐나다, 하와이, 발리 섬, 대만... 매년 같은 멤버로요. 스위스가 참 좋았어요. 하와이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히로오 씨 : 그랬구먼. 허허.

    아사코 씨 : 모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잘 맞아서 서로 집도 오가고 밖에서 식사 모임도 하고 그랬어요. 하지만 서로의 영역에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여행을 거듭하면 공통 추억이 생기잖아요. 예전에 저 사람이 바다에서 배가 거꾸로 뒤집혀서 큰일 날 뻔한 적도 있었어요. 호호. 항상 그런 일이 화제의 중심이라 모임이 오래 지속되었는지도 몰라요. 

    - 108-110쪽


        호스피스 의료 종사자도 아니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당사자도, 그 가족도 아닌 내가 이 책에서 전달하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렇게 자문하면서 환자의 곁에 왕래하고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말을 문자로 남기는 의미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이 맺음말을 쓰면서 '여기에 마지막까지 살아갔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 그 외에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 197-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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